‘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 할 때//’ 후략. -이형기 ‘낙화’ 중에서. 시인은 ‘하롱 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을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을 잃은 시인은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해지는 영혼의 슬픈 눈’을 가졌겠다. 어린 시절 마당 장독대 옆, 자지러지게 만개한 자줏빛 모란과 담벼락 너머 넘실대던 해당화는 지금의 내가 꽃들에 미쳐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고 주택에 살고 있는 것도 이 꽃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다. 바야흐로 자지러지게 피던 봄꽃의 선두 주자들이 지고 있거나 졌다. 요동치던 분홍과 산홋빛, 혹은 붉었던 고운 자태들은 꽃비가 돼 산산히 흩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 틈새를 채우며 후발주자들이 봄의 절정을 연장하고 있기는 하다.유독 봄에 집중해 꽃이 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많은 식물과 꽃이 겨울철 휴면 상태에서 벗어나 기온과 일광 시간이 증가해 잎과 꽃을 피운다. 또 벌과 나비와 같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곤충들이 활동을 시작해 식물을 수분시키기 시작하는 시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꽃은 번식을 위해 곤충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는가. 꽃은 식물의 생식 기관이며 다음 세대 식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종자 생산을 담당한다는 것을. 꽃이 수분되면 꽃가루에 있는 수컷 배우자가 밑주에 있는 암컷 배우자와 수정해 씨앗을 생산한다. 이때 수분 매개체는 벌, 나비 등으로 이들을 유인하도록 꽃은 진화했다. 그렇다면 왜 꽃은 피었다가 지는 걸까. 꽃은 ‘분분한 낙화’를 통해 씨앗을 만들어 번식할 뿌리를 확보하고 그 씨앗이 다른 장소로 전달되도록 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인 것이다. 그 꽃이 지고 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니 그저 허무하지만은 않은 낙화다. 꽃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절정은 있다. 혹은 있었다. 인생의 모든 시간을 화양연화(花樣年華)로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우리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은 지고 마는 봄꽃처럼, 요사스런 자태로 우리를 홀렸던 그들 꽃처럼, 화려하고 행복했던 우리의 절정의 시간들이 ‘일단 정지’하기도 하는 꽤 많은 시절과 마주치니 매우 흡사하다 하겠다. 꽃의 여정과 인생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꽃처럼 피는 최고의 순간을 경험하지만 실수와 실패, 좌절의 시간으로 표상되는 ‘지는’ 순간을 거쳐 열매를 맺고 성과를 일궈내는 우리의 여정과 비슷하지 않은가. 기꺼이 꽃을 떨궈 꽃비로 내린 덕에, 보드랍고 여린 이파리들이 더욱 속도를 내 푸르름으로 짙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꽃이 지면서 또 다른 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이다.다가올 튼실한 결실을 위해 망설임 없이 지금의 화려한 자리를 내어 주는 그 대단한 일을 한갓 미물인 꽃이 하고 있다. 우리를, 나를 돌아본다.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운운하기 보다는 그저 꽃에게서 배우는 비우고 자리를 내어주는 용기와 겸허한 결단이 부러울 뿐이다. 가드닝을 하다 보면 매년 꽃이 풍성하게 피고 열매를 실하게 맺지는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매번 홈런을 날릴 수는 없다. 다소 부실하고 성근 열매를 맺더라도 스스로를 너무 채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알찬 결실을 위해선, 기꺼이 떨구고 솎아내는 절제와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은 그래야 할 때다. 성숙해지는 영혼의 슬픈 눈을 가져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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