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시청하다보면 자식들이 보기에 민망한 장면이 있었다. 석자 이름만 밝혀도 알 만한 사람이 초췌한 몰골로 병원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드나드는 모습도 그 중의 하나다. 돈의 위력으로 안하무인이던 재벌도 있었다. 하지만 질병 앞에서는 하나의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질병이란 물 흐름과 같은 것이어서 신체적으로 약자를 먼저 괴롭힌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환자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아니한다. 생로병사의 통과의례에 순응하는 인간정신의 근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정입학 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서울의 어느 국제중학교 이사장이 재판을 받던 날이다. 중환자 모습으로 들것에 실려 법정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여, ‘오늘 무슨 변고가 나는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필자의 그 생각은 어리석은 기우였다. 그가 재판정을 나오는 모습은 들어 갈 때 모습과 판이 했다. 
 
이불에 감싸인 채 휠체어에 실리어 가던 사람이 저토록 정상적인 자세를 취하며 또박또박 걸어서 나오는 것이다. 순간 입맛이 씁쓸했다. 저 학교를 거쳐 나간 졸업생이 불쌍하고, 재학생이 가련했다. 저 인사가 입・졸업식 때 성인군자처럼 좋다는 말은 다 했을 터이니, 학생들이 지난날 가식의 허울을 뒤집어썼을 그의 민낯을 보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이왕이면 쇼맨십을 발휘하여 퇴청 할 때도 휠체어에 실려 나올 것이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이는 필자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자본주의 국가 운영체재에 거부감을 갖거나 이에 대한 비평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상대적으로 우월한 체재가 민주주의란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부정적 의미까지 애써 변명하지는 않는 입장이다. 도하,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온갖 작태를 보면서 인간 그 자체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위기감이 앞서는 것만은 사실이어서다. 국가가 부강하려면 경제가 우선이다. 경제를 바꾸어 말하면 돈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돈이 없으면 창문으로 도망간다.’라는 외국 속담이 있다. 우리의 물신주의 사상에 젖은 모습을 두고 하는 말 같아 왠지 뜨끔하다.
그렇다면 돈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김형자의 『구멍에서 발견한 과학』 ‘토큰과 엽전’ 「같은 구멍이지만 사연은 다르다」를 읽어보면 지금 쓰고 있는 근대식 주화 이전에 쓰였던 돈 엽전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엽전은 해동통보다. 그런데 이 엽전은 그 가치에 앞서, 모양과 문향에 심오함이 배어있다는 것이다.
고려 숙종 때(1097년) 의천이 엽전을 만들어 쓰자고 건의한 <화폐론>에는 엽전을 묘사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엽전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본뜨고, 네모난 구멍은 땅을 본떴다고 하니, 다시금 조상들의 지혜에 고개가 숙여진다. 엽전의 대표적인 ‘상평통보’는 ‘떳떳이 평등하게 널리 통용되는 보배.’ 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돈의 가치와 효용성을 모양과 문향에 한껏 담았다.
1977년부터 1999년까지 통용되던 버스 토큰은 옛날 엽전과 같은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가운데 뚫린 구멍은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토큰이 원형인 것은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각보다 곡선이 훨씬 눈의 자극이나 피로를 덜어 주기 때문에 곡선을 택하였다. 가운데 구멍은 지금의 동전과 확연히 구별하기 위한 디자인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서책 『구멍에서 발견한 과학』의 말미에 제시된 경구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요즘의 주화에는 엽전처럼 철학이 담긴 구멍이 없다는 지적이다. 그 구멍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보다 사람을 더 중시하는 인본주의 정신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저자 김형자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배금주의 사상에 빠지고 물신주의에 젖어 금수가 되어 버린 자들의 가슴으로 정확히 날아가 꽂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구멍의 의미를 가진 한자로 穴(혈)자가 있다. 옛날 사람들의 주거인 동굴이나 움집의 움푹 파인 모양과 출입구를 그린 상형자다. 같은 구명이되 ‘상평통보’의 구멍과 ‘토큰’의 구멍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가치의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구멍의 의미를 깊이 새겨 볼 일이다. 구멍에도 이렇듯 삶의 철학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