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사랑의 단상》 중).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단상》 원제는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에 빠진 이의 단상이란 뜻이지만 사랑 = 단상이라 말해도 될 듯하다. 사랑은 종잡을 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말(discours). 그리고 총합할 수 없는 부스러기들(Fragments).    사랑에 빠진 사람은 대상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말한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혼잣말처럼 감정 부스러기를 토해낸다. 이 글은 위 인용 구절을 읽는 동안 내 마음속을 떠돌아다닌 언어 부스러기들이다.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는사랑은 비대칭인 경우가 많다.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의 크기가 비슷하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는 비대칭 상태에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더 사랑해주길 갈구하다 집착이 되곤 한다. 반대로 덜 사랑해주길 바라며 더 사랑할 대상을 찾기도 한다.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굳이 말하자면 더 사랑하는 쪽일 것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원하는 만큼 사랑을 못 받는다는 생각에 결핍을 느낀다. 상대가 채워주기를 바라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구멍 속에서 허우적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더 사랑하며 아파한다. 그렇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다린다.    다시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기다림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이라고. 기다림은 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더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기다림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으로 인한 고뇌의 소용돌이”.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늦는 상대 때문에 나의 시간도 늦춰진다. 나의 세계도 조금씩 뒷걸음친다. 그만큼 너를 향한 갈망과 내면의 결핍은 커져만 간다. 시인 황지우는 말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문이 닫히는 순간 뒷걸음치던 나의 세계도 문이 닫혀버린다. 늦어짐뿐만 아니다. 늦는 이유가 대수롭지 않다는 점도 고뇌의 원천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무엇을 위해 약속에 늦기 일쑤다. 우선순위에서 배제되는 더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을 잘 알지 못한다.일찍 도착하는 사람의 슬픔감정 크기의 비대칭은 이처럼 시간의 비대칭을 낳는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약속장소에 그리고 상대 마음에 언제나 “정확히 일찍 도착”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보지만 실패한다. 상대가 자신을 알기도 전에 또는 사랑을 느끼기도 전에 혼자 사랑에 빠져버린다. 속수무책. 반면 덜 사랑하는 사람은 약속장소에도 상대 마음에도 늦게 도착한다. 기다리지도 않는다. 중간에 다른 사람을 만나 약속을 깨기도 하고, 만나지 않아도 그냥 안 오곤 한다. 결국 기다리지 않는 나아가 도착하지도 않는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은 “패자”가 된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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