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라는 조선시대의 내간체 수필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글을 초등학생용 동화로 각색하여 ‘아씨방 일곱 동무’라 제목을 붙인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규중칠우쟁론기는 규방 여성들이 바느질 할 때 꼭 필요한 일곱 가지 도구를 의인화하여 그것들이 각각 옷을 만드는 데 자신의 공이 가장 크다며 왈가왈부하며 다투는 내용입니다. 
 
옷을 짓던 규중 부인이 잠깐 잠이 든 사이에 바느질 도구인 자(척부인), 가위(교두각시), 바늘(세요각시), 실(청홍각시), 골무(감토할미), 인두(인화낭자), 다리미(울낭자)들이 옷 짓는 데는 자신의 공이 으뜸이라고 자랑하며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잠에서 깬 부인이 너네는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들을 이용하여 옷을 짓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공이라며 그들을 꾸짖습니다.
소재와 형식은 다르지만 윤병무 시인이 쓴 ‘고마운 나에게’라는 동시도 창작 의도는 앞에 언급한 내간 수필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는 인체를 이루는 각 기관의 기능을 언급하며 각각의 인체 기관이 제 역할을 잘해주어서 ‘나’를 나답게 해주니 고맙다는 내용을 담습니다.
  (전략) 감각 기관아 안녕? / 몸 바깥 일에 반응하게 해 주어 고마워 / 너희가 없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 덕분에 주변의 자극을 알아차릴 수 있어 // 뇌야 안녕? / 나에게 인사할 수 있게 해 주어 고마워 / 네가 없이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 / 덕분에 네가 바로 나라는 걸 알게 되었어. ( ‘고마운 나에게’ 마지막 두 연)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전체는 부분들이 적절하게 구조화된 덩어리입니다. 부분이 없으면 전체가 있을 수 없으니 부분과 전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한지는 가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양자역학 창시자로 31살에 노벨상을 수상했던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학문적 자서전 「부분과 전체」에서 과학은 작은 부분을 연구하지만 결국에는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를 이해하려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부분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것들이 상호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전체를 놓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과학자는 과학적 발견인 사실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인식과 자연의 관계라는 전체에 대한 깊은 통찰과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담은 명저입니다.
시선을 우리 사회로 돌리면 작금의 우리 정치인들은 전체를 위해 부분이 책임져야 할 덕목을 깨끗이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책임은 고사하고 부분으로서의 제 역할을 전체라고 오인하는 규중칠우들처럼 아집에 빠진 정쟁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의 본질을 소극적으로 정의하자면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위해 정치행위라는 부분들이 상호 협력하여 더 나은 사회라는 전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 정치상황이 과연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나를 위시해서 주위의 지인들 중에서 요즘은 TV에서 정치 관련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바꾸어 버린다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여(與)든 야(野)든 어느 쪽도 국민과 국가라는 전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인다고 평가합니다. 입으로라도 국민의 눈치를 본다던 과거 정치판과 달리 지금은 입으로라도 전체를 말하지 않아 보입니다.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려는 협력과 협치는 우리 정치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품위 없는 거친 말들로 상대를 공격하기에 급급한 ‘부분’들이 조화로운 ‘전체’를 생각이나 할까요?
옛날에 뒷다리가 없는 낭(狼)이라는 늑대와 앞다리가 없는 패(狽)라는 늑대가 있었답니다. 이 둘이 움직이려면 둘이 앞뒤로 꼭 붙어 다녀야 하는데 어쩌다가 둘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가려고 하는 방향에 각자의 고집을 피우면 움직일 수가 없으니 꼼짝 없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어그러진 형편을 가리키는 ‘낭패’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습니다. 
 
또 ‘비익조(比翼鳥)’라는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씩뿐이지만 매우 금슬이 좋아 꼭 붙어서 수컷의 왼쪽 날개와 암컷의 오른쪽 날개가 일체를 만들어 날았다 합니다. 그러다가 한 쪽이 죽으면 다른 쪽은 날 수가 없어서 죽게 되었겠지요. 결국 낭과 패든 비익조든 한 편이 없으면 다른 편도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협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낭과 패가, 비익조가 각자의 부분으로 전체를 이루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 혹 견해에 차이가 나더라도 적절히 조율하여 두 몸이 나뉘지 않아야 죽지 않습니다. 양보와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조율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생존 전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