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Stevens) 미국인, 외교관. 1904년에서 1908년까지 우리나라에 머무른 외교고문으로,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일본 외무성 고용원으로 있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는 기사를 미국 신문 등에 발표, 우리나라 국민의 불만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908년 3월 23일 미국으로 돌아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보호 정치를 찬양한다고 기자들에게 공개하니, 이에 격분한 한국인 청년 전명운(田明雲) 24세 · 장인환(張仁煥) 31세 등에 의해 미국 오클랜드 역에서 권총으로 저격당해 죽었다. 전명운〔(1884~? 의사(義士), 서울출신)〕은 미국에 유학하여 학업에 종사하던 중, 1908년 3월 21일 구한국 정부 외교 고문인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왔다.   스티븐스는 전에 일본 외무성 고문도 지냈으며,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고문정치가 실시되어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침탈을 위해, 일본인 재정 고문 메케타(目賀田種太郞)와, 외교 고문에는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일본 정부의 파견에 의해 한국 정부 고문직에 취임한 자로서,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아,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에 관한 일본 측의 변명을 선전키 위해, 정략 휴가차 귀국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찬양하면서 한국 민족은 독립할 능력과 자격이 없는 미개 민족이라는 등, 망발을 늘어놓아, 재미 교포들을 격분케 했다. # 이렇게 나라의 명예를 훼손하는 친일 행동적 망언에, 국민의 집단 지성의 항의를 받았으나, 추호의 반성이 없자, 이때 최유섭 등 한국 교포 대표 4명으로부터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친일 망언이 계속 되자, 이에 전명운은 스티븐스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을 누를 길이 없어, 권총을 휴대하고, 그를 뒤따랐다.   1908년 3월 23일, 상오 9시 30분, 워싱턴행 오크랜드 역전에서 저격코저 기다렸다가, 먼저 권총을 빼어 스티븐스를 쏘았으나, 불발되어, 총신으로 그를 내리치면서 격투를 벌이던 중, 뜻밖에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동양계 청년의 총탄이 연발로 쏘아대니, 스티븐스를 명중시키고, 전명운 자신도 유탄에 맞아,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그 청년이 한국인 장인환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판박이, 우연의 일치이다. 그 공통의 우연성의 밑바탕에는 오래 전부터 품고 있는 원한의 공감대가 깔려 있었다. 사건 현장에서 전명운은 장인환과 함께, 미국 경찰에 체포되어, 7년 11개월 형을 언도 받았으나, 그의 열렬한 애국심이, 동정을 받아 95일 감금당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장인환은 25년 형을 언도받았으나, 그의 애국심과 단정한 품행이 좋은 평가를 받아, 10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출옥했다. 전명운은 출감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서,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 장인환(1877~1930, 구한말 의사, 평양 출신)의 거사 기록이 전명운과 사건 내용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 각자 애국적 결행의 개별 사항을 존중하다 보니 중복기록이 되어 양해 바란다. 장인환은 1895년 민비 시해사건을 계기로, 국운이 급격히 쇠퇴함을 보고, 새 문명을 배워 구국의 힘을 기르고자, 미국에 유학했다.    1905년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외 동포들이 울분을 금치 못하는데, 1908년 한국정부의 외교 고문이며, 친일주의자 스티븐스는, 일본정부의 조정에 의해, 허수아비 노릇을 하던 자로, 신문 기자를 모아놓고, ‘을사보호조약은 한국민을 위하여 취해진 당연한 조치이며, 한국민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 몽매한 미개 민족이라’는 친일적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만행에, 분격을 참지 못한 장인환은, 그를 그냥 둘 수 없어,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와 함께, 워싱톤으로 출발, 오크랜드 역에 내리니, 장인환 외에 또 한사람이, 앞서 그를 뒤따르던 청년이, 한국인 전명운이었다. 그는 먼저 권총을 빼어 스티븐스를 쏘았으나, 불발되어 육박전으로 격투가 벌어졌다. 엎치락뒤치락 아수라장이 되어, 주먹다짐이 오고 갈 때, 장인환은 권총을 뽑아 연발하고, 스티븐스를 쏘아댔다. 전명운도 장인환이 쏜 총탄에 어깨를 맞아, 부상을 입었다. # 이들의 거사는 하등의 사전 모의도 없이, 우연히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같은 목적으로 같은 대상을 해치운 것이, 민족의 분출된 의분심의 발로가 같이 모아 진 것만 같다. 이와 같은 의식의 발동은, 민족 존엄 정신을 기리는 자각에서 우러나온다.   이들은 행동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생각했고, 국제간 인권이 존중되고, 사회가 정직해진다면, 저격수단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신념에서 살아왔다. 이미 대화를 통해 국제간 갈등을 해결하기에는 불가능해, 의를 위해 일으킨 일련의 거사였다. 본래 인류의 역사는 본성을 이성이 조정하며, 진보하는 것이다.   사건 현장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함께, 미국 경찰에 체포되어 형무소살이를 하다, 전명운은 95일 만에 풀려났고, 장인환은 애국 충정에 의한 국사범으로 인정되어, 특사로 10년 만에 풀려났다. 장인환은 그 뒤 1927년 봄에 귀국하여 조만식 · 김동원 등이 베푼 연회에서 수많은 동포의 위로를 받았다. 그때 나이 51세였으나, 아직 미혼이라, 평양 숭인학교 출신인 묘령의 여인 윤치복으로부터 구혼을 받고, 결혼하여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여생을 마치니, 교포들이 모여 사회장을 치렀다. 두 사람 똑같이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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