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을 담고자 하는데, 물을 담을 그릇의 크기가 1리터이면 당연히 1리터의 물이 담길 것이며, 10리터의 그릇이라면 10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아예 뚜껑이 밀폐된 그릇을 소나기가 내리는 마당에 둔다 한들 거기엔 단 한 방울의 물도 담기지 않으리라는 것이 예측인지 아니면 확정된 결과인가를 묻고 싶어진다.사람이란 지성(知性)을 담는 그릇과도 같아서, 한 사람의 인격이나 지성의 깊이가 바로 그 그릇의 크기에 비견될 것인데, 부처님이 '대중의 근기(根機)를 보아 설법하라' 한 것은, 말을 듣는 대중의 인식 수준에 어울리는 언어를 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반대로 대중이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쳐도 청각(聽覺)을 상실한 사람이나, 또 두 귀를 가지고 있으되 전혀 언해력(言解力)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이독경(牛耳讀經)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니까 팔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한들 단 한 글자의 의미를 확연히 깨닫는 것만 못하니, 오죽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 무언참선(無言參禪)을 강조하였을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육법전서(六法全書)를 암기하여 위없는 엘리트의 권위를 획득한들, 그것이 지성이며 그것이 그 사람 그릇의 크기인가?참으로 편협하고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자들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 분노스러운 희극을 연출한다. 짐의 말이 곧 법이라고 한 전제군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말 국어사전 어휘의 의미까지 내 뜻을 따르라는 사람이 있었을까? 단어는 한 사람이 그 의미를 주장하여 통용되는 것이 아니며, 동일 언어권 모든 사람이 정한 공통의 규약이며 그 언어의 의미를 정의한 것이 바로 사전(辭典)이 아닌가?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지악위선(指惡爲善)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지악위선(指惡爲善)은 다시 권악징선(勸惡懲善)이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에조차 없는 이상한 단어를 만들게 되니, 이제 드디어 반어법(反語法) 한류를 만들자는 것일까? 우리 말 한글이 AI 시대를 맞아 만국 공통어로 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각광받는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발음기호로서의 과학성에 있다 할 것인데, 뉘라서 우리말을 오염시키려 하는가? 허구한 날 우리말의 의미를 공방하고, 우리말로 씌여진 법전(法典)의 법리(法理)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법(法)은 그와 같은 우격다짐을 방지하기 위해 성문화(成文化)시켜 놓은 것인즉, 어느 개인의 주관이나 주장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간장 종지에 담긴 물은 갈증을 해소하기에도 부족한데, 그 물로 농장을 가꾸겠다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신뢰할 것인가? 근기를 보아 설법 하듯이 그릇을 보아 용수(用水)를 담는다. 물을 모으기 위해 비(비)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선 큰 그릇을 준비해야 필요한 물을 모을 것이다. 스스로 제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안다면, 담을 수 있는 물의 량은 자명하다.스스로의 역량과 자격을 알지 못하고, 큰 꿈을 꾸는 자는 자신이 불행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타인에게도 큰 불행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억겁(億劫)에 미칠 지중한 업식(業識)에서 벗어나게 되리니, 어리석음을 변명하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그릇을 가지는데, 그 그릇에 담긴 물은 언제나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일뿐임을 알았으면 좋겠다.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내가 알게 된 것은 나(我)라는 그릇의 크기와 모양을 그나마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