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 15-1번지에 가면 조선 중기의 명장 신립 장군(1546~1592)의 묘가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보다는 무예 닦기를 좋아하여 22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도총관·도사(都事)·경력(經歷) 등 다양한 벼슬을 거쳐 외직인 진주 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으로부터 거친 성격을 고칠 것을 종용받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목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도 하였다. 
 
선조 16년(1583)에는 온성 부사가 되어 북방에 쳐들어온 여진족 니탕개(泥湯介)를 물리쳐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 추앙받았으며 또한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6진을 지켜냈다. 육진(六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신립의 용맹 때문이었으며, 평상시에도 철기(鐵騎) 500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이 귀신같아 야인들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로 158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0년 2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내직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항상 군비(軍備)의 부족함을 논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전라·경상의 3도 순변사로 임명되었는데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충주성 밖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가 패배하자 남한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하들이 시체를 건져 서울로 오는 도중 ‘장군님’ 하고 부르면 관속에서 ‘오냐’하는 대답 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 장군의 묘는 지금 광주시 곤지암읍에 있는데 이는 신립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양으로 운구 중 곤지암 앞을 지날 때 운구 마차가 땅에 붙어 꼼짝도 안 하자 이곳에 묻히고 싶다는 장군의 뜻이라 생각하고 인근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고 전한다. 장군이 죽은 후 조정에서는 영의정으로 추증하였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 묘소는 1986년 9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앵자봉(670.2m)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학동리의 뒷골산(490m)을 일으키고,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와 초시당산(390m)을 지나 묘소 뒤 윗장고개산(300m)을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혈장 뒤 현무봉은 금형체의 귀봉이고 좌우의 청룡·백호는 묘역을 유정하게 잘 감싸주고 있어 장풍국(藏風局)을 이룬다. 
 
이곳 묘역은 혈의 사상으로 보아 유혈(乳穴)의 혈장으로 주산에서 묘소까지는 지현굴곡을 하였기에 용맥에는 힘이 있다.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의 원칙에 따라 혈은 용진처(龍盡處)에서만 맺는다. 그런데 이곳 장군의 묘소는 용의 끝자락인 용진처가 아니고 지기맥이 그냥 통과해 버리는 과룡처(過龍處)에 부인 전주최씨와 함께 합장으로 모셔져 있다. 
 
풍수 고서에는 과룡지장삼대내절향화(過龍之葬三代內絶香火)라 하여 이러한 곳에 장사지내면 후손이 귀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평산신씨 종중 묘원으로 긴 산줄기에 상하로 5기가 모셔져 있고 장군의 묘는 세 번째 묘소다. 수세는 좌우 용·호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마을 앞 곤지암천에 합류 후 우측으로 흘러 팔당호에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