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뉴욕시의 허드슨 강변에는 ‘라과디아공항’이 있다. 뉴욕시의 관문인 이 공항의 이름은 한때 뉴욕시장을 지낸 라과디아를 기념해 붙여진 것이다. 라과디아는 재임중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라과디아는 본래 판사였다. 어느날 법정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절도혐의로 불려왔다. “나이가 든 사람이 왜 빵을 훔쳤소?”. “사흘을 굶었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당신의 죄는 벌금 10달러에 해당합니다”라고 판결했다. 이어 그는 말하기를 “당신이 굶어 배고플때 나는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은 죄로 그 벌금은 내가 내겠소”라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냈다. 계속해서 그는 방청석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50센트씩의 벌금을 내시오”. 모두 47달러50센트가 즉석에서 걷혔다. 미국사회에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그 유명한 ’라과디아의 명판결‘이다. 동시대를 함께한 것만으로 죄가 되고 공범이 되는 사회를 라과디아는 명판결을 통해 웅변으로 부르짖었다.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극복해 나가자는 것이었고 그의 이런 시대정신과 공동체의식은 후에 뉴욕시장에 당선된 뒤에도 시정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북한의 도발과 핵위협이라는 고통을 공유한 시대를 살고 있다. 온 나라가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고 분열되었던 여야도 그들의 도발앞에선 한목소리를 냈다. 1 70발의 포사격에 80발로 응수했다는 국방부발표에 몇배로 응수해야 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전투기로 북한의 포진지를 정조준, 초토화 시켜야 했다는 전직 국방장관의 질책도 있었다. 대통령에게 왜곡된 정보로 확전방지 운운 하는 말이 나왔다며 청와대와 행정부의 일부 간부들을 겨냥 “개새끼들”라는 극언을 퍼부은 국회의원도 있었다.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의 안위를 함께 걱정하고 해답을 찾는 목소리들이다. 시대적 아픔인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데는 공동체의식과 사회통합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이런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임진왜란때는 국가의 부족한 군사력을 극복하기 위해 곳곳에서 의병이 나와 누란의 위기를 이겨냈고 IMF위기 때는 모든 국민이 금을 내다팔아 외환보유고를 높였다.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였다. 지금 우리는 북한의 도발로 그런 위기를 맞고 있다. 또한번 일치된 국론과 시대적 고통을 함께 헤쳐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노작가 이외수씨가 “늙어도 통을 쏠 힘은 있다”고 말한 것처럼 도발앞에서 하나가 되어 라과디아적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행동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포사격으로 민간인들이 죽고 주택이 초토화 되었는데도 ‘우리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포’라고 희화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비군 동원령을 유포해 큰 혼란과 위기조장을 부추긴 사람, 이외수를 전쟁옹호자. 위기를 조장한 사람으로 매도한 사람, 이들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위기를 희석시키는 반사회적 인물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고립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판사도 방청객도 예외는 아니다. 다같이 벌금을 내며 아픔을 공유하듯 북한의 도발에도 라과디아적 발상과 호응이 필요하다. ‘빵훔치는 사회’는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인보정신이, 무력도발에는 ‘정신적 결집’이 요구되는 것이다. 북한은 천안함사태이후 계획적인 도발로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과 김정일 부자의 공격적 행보, 휴전후 최초의 연평도 포사격과 민간인 사살은 우리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일각에선 그동안의 소극적 대처가 북한의 도발을 키워 왔다고 주장한다. 명확한 것은 이후 북한의 도발에는 몇배로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여기에 또다시 딴지를 걸고 나아갈 길을 방해한다면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적어도 안보앞에선 일치된 모습이 절실하다. 북쪽의 도발로 가족과 아들을 잃은 사람들과 일생 이산의 아픔을 안고 한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네티즌들의 그릇된 문화는 차제에 완전히 근절시켜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는 법을 엄중히 적용하고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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