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식당 앞을 지나칠 때다. 구수한 비지장 냄새가 갑자기 시장기를 자극한다. 어린 날 화롯불 위에서 부글부글 끓던 뚝배기 속 비지장 냄새를 그대로 닮았다. 이 냄새에 흰 쌀밥을 비지장에 말아서 한입 뚝딱 먹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비지장 끓는 냄새 속에는 어머니의 정이 배어있어서다.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다 남은 비지를 발효시켜 겨우내 우리들에게 비지장을 끓여주었다. 요즘도 비지장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그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던 그 맛을 떠올리며 딴에는 솜씨를 다해서 비지장을 끓여보지만 어머니 손맛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그리움이 많아진다고 했던가. 그동안 메말라 버린 가슴에 그리움이 터를 잡지 못하더니, 비지장 냄새가 문득 나를 유년시절의 고향으로 이끌어 갔다. 어쩌거나 우리를 키워준 고향마을엔 우리들이 남겨놓은 이야기가 세월을 포개며 곰실곰실 자라고 있다. 비지장 내음에 홀려서 고향을 떠올리려니 문득 어느덧 저만큼 자라버린 딸애들이 생각난다.    그 아이들이 훗날 내 나이가 되어서, 추억으로 남을 그리움이 잉태되고 있기나 한 것인가. 그동안 아이들에게 내가 심어준 추억이라고는 없는듯하여 하는 소리다. 요즘 아이들이 자기들의 어린 날을 이야기 할 때 단골로 빠뜨리지 않는 게 있다.    “엄마가 우리 어렸을 때 도넛을 만들어 줄 때 그 맛 참 좋았다. 그리고 엄마가 짜준 벙어리장갑 끼고 학교가면 아이들이 예쁘다고 부러워했었다. 엄마는 우리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도 안했었는데 요즘엔 엄마 잔소리가 늘었다.” 퍽 애교스런 불평이다.    지난날 먹고 사는 일에 골몰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키우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게 하는 투정이기도 하다. 아이들 어렸을 때 놀이공원도 데리고 가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도 데리고 갔더라면 더 아름답고 풍부한 추억으로 남으련만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아이들에게 그리움의 씨앗을 남겨주지 못한 자책 때문인가,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마음에서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외식을 했었다. 말이 외식이지 근사한 식당이 아닌 허름한 한식집이었다. 우리 고유 음식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청국장을 사먹으러 간 것이다.    어머닌 비록 청국장이었지만 그 어느 음식보다 맛나게 드시며 모처럼 딸과의 외식을 어린애처럼 좋아라 했었다. 어머니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로소 ‘내 가슴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한 자락’을 또 만들었구나 싶었다.    ‘먼 훗날 어머니가 이 세상 분이 아니었을 때 나는 오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청국장 냄새만 맡아도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 할 것이다.’ 라는 엉뚱한 생각에 잠기자 괜스레 눈시울이 젖는다. 그리움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마음이다. 그리움이 깡그리 사라지는 날 감동 유발도 정지될 것이니,   이럴 때면 마음을 달래주는 노래 ‘미련’이 생각난다. 노랫말을 듣는 순간 매료된다. 연서(戀書)보다 더 진하게, 더 강렬하게 마음을 짓누른다. 여느 때는 노래를 부르다가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가을하늘 드높은 곳에/ 내 사연을 전해 볼까나/ 기약한날 우린 없는데/ 지나간 날 그리워 하네/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리움은 인정이 키운 싹이다. 이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슴으로 절절히 그리워하는 이가 내게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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