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8천700m 야영' 기록을 세운 박상열 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이 26일 오전 7시47분께 대구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1세.대한산악연맹 등은 박 전 부회장이 26일 오전 7시47분쯤 대구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고인은 194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폐활량으로 수창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구 와룡산(299.7m)에 올랐고, 1959년 대구고 산악부를 거쳐 청구대를 중퇴한 뒤 1964년 경북산악회에 가입했다.1962년 대한산악연맹 창립 후 첫 해외 원정이었던 1971년 로체샤르(8,383m) 원정대(대장 박철암<1918∼2016>)에 포함됐다. 당시 최수남(1941∼1976)씨가 한국인 최초로 8천m를 넘었다는 기록을 남긴 채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이때 네팔 관광성에 에베레스트 등반 신청서를 제출했다.1977년 에베레스트 등반 원정대(원정대장 김영도<1924∼2023>, 등반대장 장문삼 등 총 18명)에 등반 부대장으로 참가했다. '1차 공격조'로 지명돼 셰르파 앙 푸르바와 함께 9월9일 도전에 나섰다. 정상 바로 밑에 있는 11m 높이 설벽인 힐러리스텝(8,790m) 앞에서 앙 푸르바의 산소가 떨어졌다.    약 8천800m까지 올라갔을 때 앙 푸르바가 기진맥진해서 두 사람을 묶은 자일을 풀고 "나를 놔두고 혼자서 올라가라"고 했지만, 고인은 자일을 다시 묶고 함께 돌아서는 쪽을 택했다.산소도, 마실 물도, 비상식량도 다 떨어진 상태에서 앙 푸르바가 걷기를 포기하자 박상열은 남봉(8,760m) 바로 밑에서 야영을 감행했다. 이는 세계 등반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무산소 비박(bivouac·야영)으로 기록됐다. 이후 고상돈이 1977년 9월15일 낮 12시50분 국내 최초, 동양에선 2번째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박상열의 의리있는 행동은 한때 국민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이후 고인은 1989년 대구·경북연맹이 추진한 히말라야 초오유 원정대장을 맡았지만, 정상 등정 대원이 1995년 월간 '사람과 산'에 찾아가 "내가 오른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양심 선언을 하면서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1992년 아콩카쿠아 원정대장, 1999년 칸첸중가 원정부단장, 2000년 새천년 에베레스트 원정단장, 1983∼2001년 대한산악연맹 이사 및 부회장. 2001∼2003년 대구시산악연맹 회장으로 활동했다.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체육훈장 맹호장과 자랑스런 대구시민상을 받았다.유족은 부인 김근복씨와 사이에 1남1녀(박승준<가온전선 동해남부영업소장>·박정완)와 며느리 오유경씨, 사위 김영진씨 등이 있다. 빈소는 대구파티마병원 장례식장 501호실, 발인 28일 오전 10시, 장지 영천 만불사. ☎ 053-940-8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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