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관에서 '하얼빈'이란 제목의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꽁꽁 언 두만강을 눈보라 속에서 건너는 인물을 카메라가 줌인하며 영화가 시작됩니다.   먼 길을 오래 걸어와 지친 몸이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인물은 놀랍게도 안중근의사입니다.   강인하고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를 묘사하여 관객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영화나 뮤지컬도 있었지만 이 영화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적의 수괴 이등박문을 처형하기까지의 악전고투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줍니다.   일본군에 부대원들을 거의 잃은 자괴감을 안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동지들을 만나러 가는 안중근의 눈과 얼음의 길은 엄혹한 일제 강점기를 약속되지 않은 희망으로 견디면서고 결국은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우리 민족의 결기를 표현하는 상징이라 느꼈습니다.  전체적으로 내내 어두웠던 화면은 시대의 절망감과 좌절을 바탕색으로 하여 서사의 씨실과 날실을 짜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내용을 복기하는데 유독 기억나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비록 가상의 대사이긴 하겠지만 이등박문이 조선의 백성들을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에서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골칫거리라고 평가합니다.   그 평가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결국 이 영화가 지향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이천 년 가깝게 디아스포라를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온 유태인이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우리 역시 그에 못하지 않는 위대함을 지닌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읽었습니다.   요즘 속언으로 '국뽕'이라고 하는가요? 젊었을 때는 가지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 생깁니다. 수백 번이나 외세의 침략을 받고도 이어온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자랑스럽고 서른여섯 해나 남의 나라에게 국권을 강탈당했지만 기필코 도로 찾아낸 은근과 끈기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북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처절하게 파괴된 폐허를 반세기만에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 문화대국의 위상을 이룬 것도 다른 어느 나라에 유례가 없이 독보적 업적입니다.   이런 경이로운 역사를 써 온 주체가 지배층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던 양반 관료들이 아니라 소위 민초(民草)라고 하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누란의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아무런 실속 없는 당쟁만 일삼다가 왜군의 침입으로 한양도성이 유린당하고 임금은 북쪽으로 난을 피하다가 궁극에는 다른 나라로 몸을 피할 생각까지 할 때, 의병을 모으고 턱없는 무기로 왜군을 맞아 싸우던 이들은 벼슬 없는 백면서생이었고, 스님들이었고, 양반들에게 수탈당하던 어리석은 백성들이었습니다.   물론 성을 지키다 순절한 김시민장군이나 13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적을 수장시킨 이순신장군과 같은 이들의 애씀도 높이 사지만 그 바탕에는 삶의 터전을 지키며 죽어간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이 있습니다. 행주산성에서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던 여염의 아낙들이 있습니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말겠다는 희망을 신념으로 삼은 평범한 보통백성들의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식민지로 동화되기를 거부한 힘이었을 것입니다.   동족상잔에 잿더미가 된 폐허에서 못먹고 헐벗으면서도 자식만은 교육을 시키려던 부모 세대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분단된 좁은 국토에 부존자원조차 빈약했던 우리나라가 내세울 수 있던 자원은 부모 세대의 희생으로 교육시킨 인적자원이었습니다. 그런 인적자원이 있어서 쉽게 정보화 사회로 이행할 수 있었고 세계적인 반도체 산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김용택시인은 자신의 시 '섬진강'에서 우리 민중의 끈기를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라고 표현합니다.   강은 역사 혹은 민족의 상징으로 흔히 쓰입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실핏줄같은 개울물이 섬진강의 명맥을 유지하듯, 우리도 그런 끈기로 지켜낸 역사가 있습니다.   존재감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실핏줄들이 큰 혈관으로 모이듯이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이 실핏줄이 되어 강을 끊기지 않게 했습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생각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략)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정작 백성의 삶은 외면한 채 의미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날을 세우던 조선의 당파싸움이 연상되는 요즘입니다.   암만 식자들이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라고들 비평해도 실핏줄같은 보통의 우리는 미약하지만 제 역할을 알고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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