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산 1-14번지에 가면 조선 중기의 문신 약봉 서성(1558~1631)과 부인 여산송씨의 합장묘가 있다.   그는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한 후 6개 도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 사헌부 대사헌, 판중추부사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서성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난 데는 그의 어머니 고성이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청풍군수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다섯 살 되던 해, 하녀가 실수로 가져온 독초(부자) 물로 세수를 하는 바람에 눈이 멀어 일평생을 장님으로 살아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딸의 앞날 때문에 근심이 떠날 날 없었고, 어느 날 딸의 배필을 찾던 중 퇴계 이황을 찾아가 부탁을 하게된다.  이황은 제자 중에 훌륭한 인품을 가진 서해라는 사람이 있으니 혼인을 시키라고 하였다. 그래서 딸은 서해와 혼인을 하게 되었고, 아들 서성을 낳았으나 남편은 결혼 5년 만에 23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그는 과부가 된 몸으로 한양 약현에서 청주를 빚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는데 그녀의 술은 맛이 좋아 사람들이 '약주'라 불렀다고 한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약주, 약밥, 약과를 만들어 크게 성공하였고 현재의 약과, 약밥, 약주 등의 단어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양에서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그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묘를 현재의 장소(포천)로 이장해왔는데 이장 과정 중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장할 때 상여 대가 부러져 고치던 중 날은 어두워지고 노숙을 해야 할 처지였는데 어떤 한 노인이 나타나 큰 기와집으로 안내를 하여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기와집은 오간데 없고 풀밭이었으며 길을 나서기 위해 상여를 드니 상여가 꼼짝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그곳에다 장사를 지내려고 땅을 팠는데 땅속에서 훈훈한 기운이 감돌며 오색토가 나오는 명당이었다고 한다.   현재 서성의 묘 옆 재실 뒤편의 묘역이다. 이 묘소를 이장한 후 아들 서성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정묘호란 때 큰 공을 세워 종1품 벼슬까지 올랐다.   이후 서성의 후손들은 조선말까지 약 300년 동안 문과급제자 123명, 정승 8명, 판서 34명 등 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광산김씨, 연안이씨와 함께 조선의 3대 명문가였다.   일찍이 남편을 여윈 과부에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아들 서성을 훌륭하게 길러낸 이 이야기는 얼마 전(2020년) TV 체널A '천일야사'에서 "가문을 일으킨 열혈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의 축석령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가 해룡산(661m)을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고 주산에서 동남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은 용진처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가에서는 서성의 묘역을 조선 8대 명당이라고도 하며 갈룡입수형(渴龍入水形)의 명당 터로 소개하고 있지만 현장에 올라 보면 장풍(藏風)이 되지 못하는 등 몇 가지 흠결이 보인다. 묘역 주변의 사신사들이 너무 멀고 낮은 편이라 우리나라의 계절풍인 차가운 북서풍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무덤 뒤편을 둘러싼 곡장(曲墻)은 북서풍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수세는 우선수에 손사(巽巳) 파이고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88향법에서는 최고의 길향인 정양향(正養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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