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49번지에 가면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김사형(1341~1407)의 묘소가 있다.
그는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1396년(태조 5) 문하 좌정승으로서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되어 대마도 원정군을 지휘하였고 이듬해 우정승으로 세자의 혼인을 관장하는 가례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가지고 와 이무(李茂), 이회(李薈)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편찬하였다.
태조(1392~1398) 연간에는 좌정승 조준과 더불어 우정승으로서 국정운영에 중책을 수행하였고 1401(태조 7)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67세로 세상을 뜨니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좌부대언 윤수(尹須)를 보내 빈소에 제사하고 익원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태종실록에는 김사형이 죽고 한 달여 후 태종은 그의 빈소와 묘막에 친히 조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졸기(卒記)에서는 성격이 원만하여 처음 벼슬을 할 때부터 운명을 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고 하였다.
묘소는 부인 죽산박씨와의 합장묘로 아홉 정승이 묻혀있다는 목왕리의 9 정승골 제일 안쪽 산봉우리에 있는데 위쪽은 익원공 김사형의 묘소이고 아래에는 그의 사위인 신효창(1364~1440)의 묘소가 있다.
신효창은 1383년에 과거에 급제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충청도 관찰사와 1420년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풍수에 밝아 조선조에서 풍수학 제조를 지냈으며 이 묘역 역시 그가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인 강원도 평창군의 두루봉(1,442m)에서 서쪽의 오대산(1,564m)을 거쳐 양평군 옥천면의 용문산(1,150m)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서쪽으로 뻗어 나와 가평군 설악면의 유명산(860m)과 소구니산(801.3m)을 거쳐 묘소 뒤 청계산(656.1m)을 일으켜 본 묘역의 주산이 되었다.
주산에서 혈장까지는 지현굴곡을 하였으며 혈장 뒤에서 과협을 하고 비룡 입수하여 혈장을 만들었다.
이곳의 혈장은 두 곳 모두 돌형으로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장풍국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지만 마치 여의주를 실에 꿴 듯한 연주혈을 맺고 있다.
혈장 뒤편에서는 과협을 하였기에 당판에는 지기가 왕성한 곳이고 풍수서마다 혈장 뒤편에 과협이 있으면 앞쪽에는 반드시 혈이 맺힌다 하였다.
이곳은 춘천 소양댐에서 흘러나오는 북한강과 남쪽의 충주호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안쪽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생기를 잘 갈무리해주는 곳이다. 일부에서는 이 묘역을 등잔에 호롱불을 올려놓은 것과 같은 괘등혈 혹은 청학포란형의 명당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