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69-5번지에 가면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인수대비의 아버지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한확(1400~1456)의 묘가 있다.   이 묘소는 크기가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기에 후일 이곳의 마을 이름을 능내리라 불렀다고 한다.   인수대비가 친정아버지의 묘에 비가 없음을 슬퍼하자 성종은 어명을 내려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고, 묘비명은 서거정이 지었고 비문의 글씨는 임사홍이 썼다.   그런데 이 비석은 중국에서 들여온 돌로 교통이 불편한 과거에 어떻게 이곳까지 옮겨왔을까?   그것은 양주시 은현면에 있는 그의 부인 남양홍씨의 묘소 앞에 가보면 코끼리의 묘가 있는데 중국 황제가 내려준 돌을 이 코끼리가 운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선물은 한확의 두 누이동생들이 중국 명나라 영락제와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으니 중국 왕실과는 처남 매부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로 한확은 중국과의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세조는 의경세자빈을 한확의 딸로 책봉함으로써 사돈 관계를 맺었으니 그가 곧 인수대비이다.   그는 음서로 관직에 올라 누이동생들을 명나라로 호송하고 귀국 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좌의정과 좌익공신에 이어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고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돼 외교적 입지를 더욱 다졌다.   이에 힘입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하여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런 후 1456년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냈고 귀국 중 사하포에서 56세의 나이로 객사했다. 1470년(성종 1년)에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가평군 주금산(814m)을 일으키고 다시 남양주시 오남읍의 천마산(812m)을 지나 조안면 능내리의 적녀봉(590m)을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묘소는 주산에서 동쪽 다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혈장은 유혈(乳穴)로 주변 사신사가 양호해 장풍국(藏風局)을 이루어주고 있다.   특히 전면 좌측에 있는 낮은 봉우리는 미인의 눈썹을 닮은 아미사(蛾眉砂)로 이러한 봉우리가 혈장 주변에 있으면 왕비가 난다는 귀한 산이다.   수세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류하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경안천의 물이 팔당호에 모였다가 한강으로 흘러나간다.   묘소와의 거리감은 약간 있으나 북한강과 남한강 그리고 경안천의 물이 합류하는 안쪽에 위치하여 최고의 수세 조건이다.   풍수서 '설심부'에서는 "수(水)를 논하는 것은 삼차구곡의 수가 으뜸으로 세 곳에서 합쳐 모인 물이 굽이굽이 굽어 조당에서 모이면 대귀할 곳이다."하였고 양공께서도 삼차구곡수가 대면에 와서 모이면 자손이 금은을 쌓는다. 라고 하였다.   이기적으로 분석을 해봐도 임자(壬子) 입수에 좌선수이고 물이 정미(丁未)방으로 빠져나가니 임관룡이라 지기가 왕성하고, 여기에 좌향도 임좌병향을 놓았으니 88향법으로도 발복이 빠르다는 좌왕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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