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갑자기 왔습니다. 초춘(初春)도 건너뛰고, 꽃샘추위도 없이 타임머신을 탄 듯 며칠 만에 풀과 꽃과 나무가 한꺼번에 서둘러 피어납니다. 돌아오는 산책길에 입고 나갔던 겉옷이 거추장스럽고 공기에 스민 은은한 봄 향기가 몸과 마음을 나른하게 하지만 이제사 한 해가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이제껏 많은 봄들을 맞고 보낸 만큼 오래 걸어와 놓고도 애써 모른 척하고픈 속마음과 달리 요즘에 와서 자주 병원 신세를 지게 되니 나이로나, 몸 상태로나 자신이 노년기에 처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오면서 한 점 부끄럼 없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나름으로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삶의 지표로 삼아왔습니다. 그런데 뜻과 달리 몸이 말썽을 피우니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짐’이 무뎌지고 게을러집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중국 고대 상(商)나라 탕왕의 세수하는 그릇에 새겨진 글귀입니다. 하나라의 신하였던 탕은 폭군 걸왕을 치고 상나라를 세운 후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이루니 성탕(成湯)이라고 칭송받던 왕입니다. 그랬던 그도 매일 아침 얼굴을 씻는 그릇에 새긴 이 문구를 보고 또 보며 현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매일매일 새롭게 나아가고자 하였으니 하물며 자랑은 앞가슴에, 흉은 등 뒤에 걸고 사는 어리석음을 예삿일로 여기는 나 자신이 삶의 귀감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더군요. 
 
사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새로워진다는 ‘신(新)’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매일매일’이라는 꾸준한 수양과 한결같은 성실성에 더 무게가 실리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한 물방울이 바위를 뚫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만 하더라도 작심삼일로 끝난 계획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한결같음’ 앞에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어느 글을 읽는데 ‘대인춘풍 대기추상(對人春風 對己秋霜)’이란 글귀가 눈에 번쩍 들어왔습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에게는 서리처럼 엄해야 한다는 의미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사자성어와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를 포함하는 많은 보통사람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자신의 언행이나 어리석은 실패에 대해서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핑계를 들이댑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대부분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즉 획일적인 잣대로 남의 잘못을 재단합니다. 보통의 우리는 자주 그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래서 ‘내로남불’이라는 은우(愚)를 범할 때 결과가 미치는 범위는 사적인 영역에 범위에서 그칩니다. 혹시 진정으로 그의 발전과 성숙을 바라는 친한 지인이 있다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을 아픈 소리로 그를 깨우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개인을 넘어서서 무리가 그러할 경우에는 누가 쓴소리를 해야 할까요? TV 화면 속 광화문 광장을 보면서 극단적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모습에 가슴이 아픕니다. 브레이크 풀린 자동차처럼 오로지 직진만 하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이분법적 대립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향한 증오와 적대감을 동반합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외나무다리 위에서 양보할 줄 모르고 대치하다가 둘 다 다리 아래로 떨어져버린 두 마리 염소의 우화처럼 양편 모두 비극적 파국을 맞게 될 테지요. 그러니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들을 돌아봅시다. 가을서리같은 잣대로 자신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보려 할 때, 서로 타협의 여지가 보일 것입니다. 국민이든, 정치권이든 어느 한쪽의 주장만 공염불처럼 되풀이하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 테러 같은 갈등이 끊이지 않는 데다 몇몇 강대국의 무리수를 둔 영토 확장의 욕심을 신(新)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우려 섞인 반응도 나옵니다. 지구촌이란 표현대로 오늘날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마을입니다. 마을 구성원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진 자의 관용과 나눔이 필요하고, 이웃집 논의 물꼬를 막아 내 논으로 물길을 돌리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아홉을 가진 사람이 다른 이의 하나를 빼앗아서 자신의 열을 채우려는 행태는 없어야 합니다.
결국 ‘일신우일신’이나 ‘외유내강’이 개인에게 적용될 도덕률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집단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가 나아가는 방향성이 바람직한가를 점검하는 잣대로도 될 법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