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705번지에 가면 조선조 초기 예조정랑(禮曹正郞) 을 지냈고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된 양계원(楊繼元)의 묘가 있다. 그는 청주양씨 시조 양기(楊起)의 5세손으로 조선 전기의 인물이다.    청주양씨 시조 양기는 원래 중국 출신으로 원(元)나라에서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과 중서성 정승을 지냈다. 1351년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황제의 명으로 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 중국에 바치고 있던 동녀(童女) 5천 명, 준마 3만 필, 비단 3만 동, 모시 6만 필을 삭감 받게 하여 그 공으로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 청백리(淸白吏)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으며 이때 본관을 청주로 하사받아 청주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은 임금께 상소하기를 상당백 양기께서 우리나라에 끼친 공훈이 막대합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그 자손들에게 군역과 잡역을 부역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합니다. 하면서 꾸준히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그 결과 선조 임금은 그들에게 군역과 잡역을 영원히 면제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예조에서는 왕명에 따라 바로 시행하니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군역과 잡역을 영원히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묘소는 원래 울산광역시 범서읍 서사리 산 74번지에 있었으나 울산광역시의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부득이 2019년 이곳 포항으로 이장해 왔다. 이장과정에 있어서 필자 역시 청주양씨 21세로 선대의 묘소이기에 모든 과정을 직접 맡아 시행하게 되었다. 다행히 본 문중의 선산이 있어 이곳으로 이장하기로 하고 이틀간에 걸쳐 간산(看山)을 하여 최종 장소를 결정한 후 문중 어른들께 아뢰었다.    그리고 이장 일자를 받아 울산의 택지조성 주최측에 통보를 하고 곧바로 작업을 시행하였다. 현재의 묘역은 낙동정맥의 포항시 북구 상옥리 병풍산(810m)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나간 지맥이 포항 북구의 주산인 비학산(762m)을 일으키고, 여기서 계속 뻗어 나가 신광면 냉수리의 도음산(385m)을 일으켜 본 혈장의 주산이 되었다.    이곳 묘역은 주산에서 서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내려온 끝자락(龍盡處)에 자리 잡았다. 본 용맥은 남쪽으로 조금 더 뻗어 나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본 혈장의 좌청룡 자락이 되었고, 우측 백호 자락은 높이 면에서 약간 낮은 감이 있으나 안산은 금형과 토형의 복합체로 후손들에게 부귀를 가져다주는 귀한 산이다. 이곳은 혈의 사상(四象)으로 볼 때 유혈(乳穴)의 혈장으로 입수(入首)가 뚜렷해 혈장에는 지기가 충만한 장소다.    묘소의 좌향은 을좌신향(乙坐辛向)이고 수세는 좌선룡에 우선수로 합법하며 우측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혈장을 완전히 감싸고 좌측 곤신(坤申/남서) 방으로 빠져나간다. 을좌신향에 곤신파구는 정양향(正養向)으로 88향법 중에서도 최고의 길향이다. 풍수고서 『地理五訣』에서는 정양향을 쓰면 “貴人祿馬上御街”라 하여 후손들은 임금이 내린 말을 타고 어도를 다닐 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고, 부귀를 겸비한 발복이 아주 오래간다고 하였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