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노후 자금인 퇴직연금 규모가 400조원을 훌쩍 넘어서는 시대를 맞았지만, 가입자들은 낮은 수익률에 울상을 짓고 있다. 하지만 정작 퇴직연금 사업자인 금융사들은 해마다 막대한 수수료 수입을 올리며 속으로 미소 짓고 있다. 이 때문에 물가상승률조차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는 형편없는 수익률에도 수익률과 무관하게 적립금 규모에 따라 '꼬박꼬박' 떼어가는 현행 수수료 체계에 대한 가입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의 고질병은 '낮은 수익률'이다. 14일 금융감독원 등 관련 기관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5∼2024년)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고작 2% 초반대에 머물렀다. 이는 같은 기간 평균 소비자물가상승률(연평균 약 1% 후반∼2% 초반)을 고려하면 실질 수익률이 거의 0%에 가깝거나 오히려 마이너스였던 해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뜻이다.상황이 이런데도 금융사들은 작년 한해에만 약 1조70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수수료 수입을 챙겼다. 가입자 자산이 불어나기는커녕 물가 상승분조차 방어하지 못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는데도 시스템 운영 명분으로 꼬박꼬박 수수료를 떼어간 결과다. 이런 현실은 금융사들이 가입자 이익보다는 안정적인 수수료 수입 확보에만 열을 올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앞으로가 더 문제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10년 안에 100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현행 수수료 체계가 계속된다면 금융사들의 연간 수수료 수입은 단순 계산으로도 4조원을 훌쩍 넘기게 된다. 가입자들의 노후 자금이 금융사들의 '안정적인 현금 창출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현재 퇴직연금 수수료는 대부분 가입자의 수익률과 상관없이 전체 적립금 규모에 연동해 정해진 비율(정률)로 부과된다. 가입자 계좌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여도 금융사는 어김없이 수수료를 떼간다. 금융사들이 해마다 천문학적인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적립금 비례 정률 수수료' 덕분이다. 적립금 규모가 커질수록 수수료 수입은 자동으로 늘어나는 구조이기에 금융사들은 수익률 경쟁보다는 가입자 유치와 적립금 규모 확대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다.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 논의가 꾸준히 나왔다. 현재 한국의 퇴직연금은 개별 기업이나 가입자가 금융회사와 '계약'을 맺고 운용하는 '계약형' 방식이다. 반면 '기금형'은 별도의 연금기금(펀드)을 설립하고, 전문적인 지배구조(이사회 등)를 갖춘 기금이 자산운용사 선정, 수수료 협상, 운용 관리 감독 등을 총괄하는 방식이다.기금형 제도는 계약형 방식보다 장점이 많다. 수많은 가입자의 자산을 모아 거대한 기금을 형성하므로 자산운용사 등에 대해 강력한 협상력(Bargaining Power)을 행사해 낮은 수수료를 끌어낼 수 있다.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기금 운용 조직이 오직 가입자의 수익률 제고를 목표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을 운용하고 관리하기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금융회사는 더 이상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기금의 선택을 받아 생존하려면 실질적인 운용 성과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많은 전문가는 "현재의 퇴직연금 수수료 체계는 가입자보다는 금융회사의 이익에 더 기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며 "'티끌 모아 태산'이 되어야 할 퇴직연금이 '티끌 모아 수수료'로 전락하지 않도록, 수수료 체계의 근본적인 수술과 함께 기금형 제도 도입과 같은 시스템 개혁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