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산 자락에 올라가면 고려말의 정경부인이었던 밀산박씨(1343~1381)의 묘가 있다. 그는 고려 충혜왕 때 밀산군(密山君) 박인(朴璘)의 따님으로 밀양박씨 전서공(典書公) 박침(朴沈)의 부인이고 정난공신 1등이며 밀양박씨 중시조인 박중손의 조모가 된다.    박침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새 왕조를 거부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두문동 72현으로 남았다. 그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5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훗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맏아들은 지생(祗生)으로 간성병마사(杆城兵馬使)이고, 둘째는 강생(剛生)으로 집현전 부재학을 지냈으며, 셋째는 눌생(訥生)으로 참판 벼슬을 지냈다. 완주에 있는 부인 밀산박씨의 묘는 한동안 실전되었으나 1838년(현종 4) 후손들이 봉서산으로 들어가 샅샅이 뒤진 결과 옛 지석과 묘광을 찾아내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런 후 묘소를 개봉축하고 석물을 세워 새롭게 단장한 후 현재까지 관리해오고 있다. 밀산박씨 묘소 변혁사실기(變革事實記)에는 세상에 조상산소의 음덕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 산소에서 연유(緣由)하였음이 명백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박씨 성 가운데 가장 번창한 문중인 규정공파는 조선조에서 70여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봉군(封君)된 분들이 15명, 시호(諡號)를 받은 분들이 13명이나 된다. 이 묘소의 조산은 종남산(680m)의 뾰족한 문필봉(文筆峯)이고 주산은 혈장 뒤 서방산(612.1m)이다. 혈의 사상으로 보아 돌혈(突穴)의 혈장으로 주산에서 혈장까지 내려온 용맥은 지현굴곡과 과협(過峽)을 하며 내려왔기에 혈장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혈장이 높아 좌청룡은 약간 낮은 편이나 외청룡이 뒤에서 받쳐주고 있고, 우백호는 거리나 높이 면에서 완전하여 장풍국(藏風局)을 이룬다. 안산은 적절한 높이로 유정한 모습이고 안산 뒤의 조산은 뾰족한 문필봉으로 혈장에 좋은 기운을 보내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곳 조산의 모습을 보고 규봉(窺峯)으로 해석하여 흉봉(凶峰)이라고 하나 규봉이란 서(書)에 이르기를, 입견좌불견(入見坐不見), 좌견와불견(坐見臥不見)이라 하여 서면 보이고 앉으면 안보이거나 앉으면 보이고 누우면 안 보이는 것이라 하였기에 보일 듯 말 듯 약간 고개를 내민 봉우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곳의 문필봉은 안산 너머로 훤히 보이기에 규봉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혈장 앞으로는 주요 혈증 중 하나인 전순석(氈脣石)이 박혀있어 당판의 생기를 잘 갈무리해준다.    이곳의 수세는 용·호의 끝자락이 잘 관쇄(關鎖) 되어 있고, 용·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묘의 앞쪽에서 합수(合水)한 후 재실인 봉서재 옆으로 지나 아래의 저수지에 흘러 들어간다.    이 묘역은 앞뒤로 뾰족한 문필봉의 귀봉이 솟아 있어 후손들에게 많은 문사들이 배출될 것을 미리 예견해주고 있다. 풍수가에서는 이곳을 봉황포란형 혹은 비봉귀소형의 명당이라고 하며 조선 8대 명당 중 한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 후손들은 이 묘소의 음덕으로 밀양박씨 규정공파가 크게 번창하였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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