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레통이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한 지 100주년이던 지난해를 전후해 세계 곳곳에서 초현실주의에 주목한 전시들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전이 17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시작한다.인간 정신을 구속하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꿈꿨던 초현실주의는 우리 미술계에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처음 소개됐다.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시도됐지만 식민과 전쟁, 분단으로 적극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채 한국 미술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앵포르멜(비정형), 단색화, 실험미술, 민중미술 등 주류 미술 운동의 흐름 속에서도 평생 초현실주의를 시도한 작가들이 있었다. 전시는 시류에 따르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초현실주의를 계속했던 작가 6명을 세상에 내보인다.이들 6명은 대중은 물론 연구자들에게도 낯선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국내에서 초현실주의를 전면에 내건 전시 자체도 흔치 않았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살바도르 달리나 조르조 데 키리코,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같은 서구 초현실주의 대가들의 영향이 드러나지만 그 안에서 독창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다.김종남(1914∼1986)은 일본으로 귀화해 마나베 히데오(眞鍋英雄)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작가다. 일본에 처음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을 소개한 후쿠자와 이치로의 회화 연구소에서 공부했던 그는 평생 초현실주의 작업을 했다. 다양한 식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자연 속에 보호색을 띤 기이한 생명체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숨어 있거나 새와 인간, 식물과 인간이 결합한 생명체가 등장하는 그림들이 많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임종할 때가 되어서야 한국인임을 밝혔던 작가의 내면 속 불안감과 갈등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김욱규(1911∼1990)는 1·4후퇴 때 가족을 북에 두고 월남했다. 함흥미술동맹 위원장 등을 지낸 경력 때문에 남한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했던 그는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부터는 창작에 전념해 400여점을 남겼지만 미술계는 물론 세상과도 별 교류가 없었고 사후에야 첫 개인전이 열렸던 작가다. 자연 속에 숨은 기이한 생명체,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 등에서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했던 트라우마와 세상과 고립된 삶을 살았던 작가의 불안감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김종하(1918∼2011)와 박광호(1932∼2000)는 활동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중시했던 전통의 현대화나 민족 정체성 탐구 같은 데 매이지 않고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나 에로틱한 환상을 그림에 담았다. 김종하는 사막과 숲 등을 여성의 신체로 표현했고 박광호는 석회동굴 속 종유석이나 구(球) 같은 오브제들의 반복을 통해 성적 욕망과 본능을 드러냈다.김영환(1928∼2011)과 신영헌(1923∼1995)의 작품에서는 종종 달리나 데 키리코가 연상된다. 신영헌은 달리가 사용한 이중 이미지(double image. 바위나 구름 등을 사람 얼굴로 의인화해 하나의 형태로 복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를 이용해 전쟁과 분단을 겪은 한국의 산천과 비인간화된 도시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과 결합한 이미지로 그려냈다.전시는 초현실주의로 분류되진 않지만 자동기술, 이중영상 등 초현실주의의 여러 기법을 차용하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함께 소개한다. 이중섭, 이쾌대, 천경자, 박래현, 권영우, 임응식 등 유명 작가들을 포함해 43명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유료 관람(덕수궁 입장료 별도)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