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감포읍 대본항은 경주의 동쪽 끝 마을로 삼국시대부터 교류가 빈번했던 항구로 추정된다. 신라의 도읍에서 울산과 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상로의 중심이었고 일본과 중국, 멀리는 서역에까지 이어지는 국제교류의 항구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항구다. 또 조선시대부터 전통 어촌마을이 형성돼 어민들이 고기잡이로 삶을 이어갔으며 비록 규모는 작지만 경주의 동해안 문화가 집적된 곳이다.일제강점기에는 동해안 일대의 수산자원이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대본항도 일본 어업 전진기지의 일부로 편입됐다가 해방 이후에는 자급자족형 어촌으로 활발한 어업 활동이 이뤄졌다. 1960~70년대에 소규모 어항 정비가 시작됐고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규모 방파제, 선착장 등의 시설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어항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2010년 이후부터는 인근의 문무대왕 수중릉, 이견대, 감은사지 등의 역사문화자원이 관광자원으로 개발되면서 작지만 알찬 관광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다양한 횟집과 민박, 일출 명소로서의 명성 등으로 경주를 대표하는 조용한 어촌 감성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대본항을 끼고 있는 감포읍 대본3리는 대밑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인근 마을인 문무대왕면 봉길리에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과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지와 함께 신라 호국의 얼이 서린 유적으로 알려진 이견대가 대본3리에 있어 대밑, 혹은 대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 신라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서린 역사유적을 끼고 있는 동해구라도 불린다. 이견대와 문무대왕 수중릉, 감은사지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성하고 고대 한반도의 융성한 국력을 세운 신라왕조의 역사적 진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대본항의 언덕 위에 위치한 누각인 이견대에 올라서면 문무대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에서 신문왕은 부왕인 문무대왕이 용이 돼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문왕이 용에게 검은 옥대를 받아 만파식적을 만든 곳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이견대에서 대본항으로 내겨가는 입구에 기념비가 여럿 세워져 있다. 이곳은 바로 동해구를 기념하는 여러 예술인들의 공을 기리는 비석을 모아둔 곳이다. 동해구는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나와 있는 신라시대의 지명이다.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대종천이 동해로 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동해구에 세워진 기념비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문화 말살에 항거해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높인 반일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의 기념비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고유섭 선생의 시 ‘대왕암’과 수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전하는 문무대왕의 호국 유언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동해구는 이견대와 문무왕 수중릉, 감은사가 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고 석굴암대불의 시선이 동해구로 향하고 있어 신라문화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조선 사람들이 민족문화의 정수이자 신라 천년의 상징인 석굴암의 존재조차 모르던 것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일본인들이 해체하고, 복원해 재발견했다고 주장했다고 주장했지만 고유섭 선생은 이런 일본의 주장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들어 반박했고 석굴암 불상의 중요성을 지적해 우리의 얼을 지켰다. 대본항을 근거지로 둔 어부들은 21척의 소형어선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긴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물속에 늘어뜨려 고기를 잡는 방식인 주낙으로 붕장어와 참가자미 등을 많이 잡았고 최근에는 동해안의 해양환경이 변화하면서 삼치가 많이 잡힌다. 그러나 항구는 그대로지만 어선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년 전만해도 40여척에 이르던 어선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어촌계도 마찬가지다. 어촌계는 27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계원들은 전복과 해삼, 미역 등을 생산하고 있지만 해녀들의 고령화로 생산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어촌계원이 60여명 정도였던 것에 비한다면 현저히 줄어든 실정이어서 공동어장으로 주민의 수입을 올리던 방식은 서서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대본항의 경제구조는 20년 전부터 상업과 어업의 복합 구조로 바뀌고 있다. 어선을 가진 어부의 절반 정도는 직접 잡은 고기로 횟집을 운영하는 형식이다. 이 지역에서 45년 가까이 횟집을 운영한 식당이 있다. 어부였던 아버지와 해녀인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을 둘째 아들 홍정태(45) 사장이 이어받아 새롭게 단장한 ‘홍씨횟집’이다.홍 사장은 “아버지가 1999년에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고기잡이를 하시던 배를 물려받아 바다로 나가면서 어부가 됐다”며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았으니 가업을 물려받은 셈이고 바다에서 잡은 자연산 횟감과 어머니가 물질을 해서 건져 올린 신선한 해산물을 장만해 손님의 밥상에 올려놓으니 모두들 맛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홍 사장의 어머니 김귀란(73)씨는 16살부터 바다에 자맥질을 시작한 해녀다. 거의 60년 가까이 해녀일을 해 온 대본항의 산증인이다. 김씨는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늘 힘드는 일이지만 바다 안에서는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씨횟집’은 홍 사장의 아버지가 잡아온 물고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회로 장만해 대접했더니 모두가 맛있다고 탄복을 했고 횟집을 하라는 권유를 해 지금의 식당 아래 있는 본가에서 횟집을 시작한 것이 45년 전의 일이다. 경주시가 동해안 해양문화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본격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지만 대본항은 그 혜택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본항 주변에 숙박시설이 다양해 주말이면 500~1000명이 머물지만 대본항에는 이들의 눈길을 빼앗을 관광 콘텐츠가 없어 대부분이 잠만 자고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본항 주민들의 주장이다. 지금은 폐교가 된 대본초등학교 자리에 문무대왕해양역사관을 조성해 올해 안으로 개관할 예정이지만 주민들은 학생들의 현장학습장으로 활용될 것이어서 소비계층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상율 어촌계장은 “대본항은 항구의 규모가 작고 방파제가 허술해 작은 파도에도 가까운 가곡항이나 감포항으로 피항하거나 육지로 인양해야 하는 형편”이라며 “방파제 보강 등 항구 정비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말했다.김 계장은 또 “소중한 신라의 역사문화유적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이 자원을 관광산업으로 연결할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한다”며 “제대로 된 홍보와 콘텐츠 보강을 거쳐 주민들의 경제활동이 다양하게 변화해야 대본항도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콘텐츠는 한수원(주) 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합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