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義)는 사람이 가야 하는 행로라 하여(義 人道也) 가는 길이 올바르면 정의(正義)이고, 그렇지 못하면 불의(不義)라 하였다. 이 길은 물리적 환경에 존재하는 도로, 산로, 마을 길 등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가야 하는 의지적(意志的) 심로(心路)이다.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인생 행로, 노말 오비탈(normal orbital)은 육안으로 볼 수 있기보다 심안으로 볼 수 있는 신념의 길이요 궤도(軌道)이다. 그래서 찾기 어렵고 조심스럽게 가야 하는 길이며 정상적 오비탈이라 생각된다. 살아가야 하는 세상 형편이 어렵고 보면 인생 행로는 멀고 피곤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진정 어느 길로 나아가야 유토피아(utopia)로 갈 수 있을 까? 행불유경(行不由徑)이라 하였으니 그렇다고 함부로 지름길을 택해서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심로의 선택은 시대를 막론하고 생애에서 제일 크고 중요한 과제라 여겨진다. 부자간의 길은 부자유친이라 하였으니 유친(有親)의 길이고, 부부간의 길은 유별(有別)의 길이며, 형제간의 길은 우애(友愛)의 길, 친구 간의 길은 신뢰(信賴)의 길, 공직자의 길은 청렴의 길, 정치인의 길은 정치적 이념(理念)을 함께한 정당(政黨)의 길이다. 이런 말들은 수없이 듣고 배웠으나 실행에서는 어떠한가.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세월이 별유(別流)하여, 부자유친의 길은 별거(別居)의 길이 되고, 부부간의 길은 가변차선(可變車線)의 길이며, 형제간의 길은 상속쟁탈(相續爭奪)의 길, 우정의 길은 산로(山路)와 같은 버려진 길, 공직자의 길은 영어(囹圄)의 길, 정치인의 길은 배신 탈당의 길로 더러 변하고 있다면 과언일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식을 낳아 애지중지 길러서 교육 시키고 혼인시켜 주면 부모 모시고 사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핵가족(nuclear family)을 이루어 원처(遠處)에 떨어져 나가 살고 있으니 별거의 길이 아닌가. 외국어를 모르는 시부모가 찾지 못하게 아파트 이름도 복잡하고 긴 것이 비싸다는 말까지 항간에 떠도니, 별거는 윤리와 도덕까지 별거가 아닌가. 화려한 혼례식에 약속한 서약이 사기성 약속이라도 된 듯 이혼이 다반사(茶飯事)인 세상이 되고 있으니 부부간의 길은 서로 고유한 가치를 존중하며 정절을 지키는 유별의 길이 아니라 가변차선(可變車線)의 길이 되고 있는가 하면, 형제간의 우애는 만사형통의 길인데, 재산의 상속 문제로 서로 다투다가 우애는 말할 것도 없고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 남보다 못한 혈연관계가 되는 사례가 없지 않으니 이 어찌 걱정스럽지 않을까. 동경(同庚)의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자주 오고 가지 않으면 정이 멀어지기 쉽기에 우정을 산길에 비유한 것이 아닐까. 산길은 자주 왕래하지 않으면, 잡초와 나무가 우거지고 길은 수목에 묻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그래서 우정은 자주 만나서 교류할 때 더욱 밝게 빛날 수 있다. 공직자는 무엇보다 청렴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 직위를 이용하여 불의로 재산을 축적하거나 직권을 남용하여 명예스러운 직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중도에 낙마하여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을 볼 때 인간의 몽매함을 부정할 수 없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정치적 신념을 함께한 동지들과 마음과 뜻을 저버리며 배신하고 탈당한 정치인들은 나름대로 특정한 사유야 있겠지만, 견득사의(見得思義)란 대의를 깨닫지 못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서 정치적 행로를 수정한다면 어찌 그 길이 온당한 길이라 할 수 있을까. 국민의 혈세를 받아서 잘 다듬어 놓은 아스팔트 세로(世路)에 사람의 탈을 쓴 잡견(雜犬)들이 활개를 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윤리와 도덕이 아무리 비정한 세풍(世風)을 받더라도, 백세 채우기 힘든 인간 유기체가 기꺼이 가야 할 길은 비정상의 선택적 지름길이 아니라 무엇보다 오상지도(五常之道)가 묵묵히 가야 하는 마땅한 인생 행로임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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