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전 일로 기억한다. 그해 한겨울 못지않게 3월 끝자락의 거리는 냉기로 옷깃을 여미게 했었다. 이 때 쯤도 봄 꽃 소식은 아마도 저 남녘땅 끝 섬 ‘가파도’쯤에서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치 않게 봄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을 알아챈 듯, 눈길을 멈추게 하는 현수막이 아파트 벽을 등지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신장개업을 알리는 광고 현수막이다. ‘벚꽃 필 무렵에 찾아뵙겠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식당의 품격이 느껴지는 상호였다. 분명 간판 못지않게 음식 맛도 있을 터이다. 벚꽃이 피면 만사 젖히고 그 집 식당을 들리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지켜지지 못했다. 깜빡 잊고 지낸 사이 ‘벚꽃 필 무렵 찾아뵙겠습니다’ 식당은 이미 개업을 한 후였다. ‘벚꽃 필 무렵 찾아뵙겠습니다’ 이건 누가 보아도 멋진 식당 광고 문구다. 바보라도 기억해낼 예쁜 언어이다. 이 문구를 떠올리려니 언어의 중요성을 새삼 깨우친다. 우리는 눈만 뜨면 언어와 마주치는 세상살이를 한다.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정과 관련된 어떤 정치인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끝내 변명으로 드러나 단명短命의 고위직 인사라는 오명을 남겼다. 언어의 역할은 소통이다. 이제는 그 본래의 목적을 뛰어넘어 처세술의 한 수단이 되었다. 문학예술은 언어를 도구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에 자주 언어를 주제로 다룬 작품이 등장하곤 한다. 언어의 중요성 때문일 게다. 이게 아니어도 ‘남의 흉이 한 말이면 내 흉은 열 말’이라고 했다. 또한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라고 했다. 말의 위력을 나타낸 말들이다. 남에게 험담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는 이를 본다. 그런 분들을 몽땅 노래방으로 모셔놓고, 럼블피쉬의 <너 그렇게 살지마> 들려주어야겠다.너 그렇게 살지마/너 아닐꺼야 그래 아닐 거야/내 눈이 나빠졌나봐/회사에 바쁜 일 있다던 니가 왜 여깄어/저 파란 셔츠 저 손목시계 내가 사준 게 맞는데/그 옆에 달라붙어있는 그 여자는 또 뭔데/한참을 멍하니 보다가 눈 마주친 순간/당황하는 니 그 표정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들어/참 기막혀 너 그렇게 살지마/어이없어 눈물조차 안 나와/너 어떻게 이러니 나 정말 잘 해줬는데/구차하게 매달리진 않을게/ (후략) 고운 말만 하다가 살다죽어도 말이 남는다. 그러니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이를 경계한 말이 인상적이다. ‘칭찬의 말은 두 발로 다니나 험담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는 말이 그것이다. 또 있다. ‘흉보면서 닮는다.’가 그것이다. 오죽하면 진실을 말할 때도 면도칼처럼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고 했을까. 부메랑이라고 하는 놀이기구가 있다. 던지면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장난감이다.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믿기에는 거리가 먼 모양의 부메랑이건만 던지면 용케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험담이 그렇다. 남에게 하는 험담이 언젠가는 나에게로 되돌아오기 마련인 것이다. 그것은 부메랑보다 더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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