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 서부1동 성암산 아래 자리한 옥곡동(법정동)은 초계정씨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창의한 정변함(鄭變咸), 정변호(鄭變護) 형제와 사촌 정변문(鄭變文)이 개척한 동네다.   이마을은 옥곡동 또는 옥실이라 했고 골짜기 뒤는 옥(玉)이 나왔다고 해서 옥골 혹은 돌산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이 자리에 경산현의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다고 해서 옥실(獄室) 혹은 옥곡(獄谷)이라고도 하게 됐다고 한다.   이외 도잠암골, 딧골 등의 골짜기, 옥실들, 홈뚝 등의 들판, 보(洑)인 새도랑, 바위인 배락바우, 굼각단 등의 명칭이 전해진다. 배락바우는 바위가 벼락을 맞았다는 데 연유하고, 굼각단은 골짜기 지형이 주위보다 높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교동(龜校洞)를 통합해 옥곡동이 되고 경산면에 속했다가 경산읍 옥곡동, 옥곡리, 경산시 옥곡동으로 바뀌어 왔다. ◆ 청동기시대 유적공원 옥곡동 고인돌로 본 경산지역 선사시대2000년, 한국토지주택공사는 29만5000㎡에 이르는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을 위해 경산 서부지구내 문화재 지표조사를 추진했다. 문화재 조사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실시했는데, 조사원들은 조사 구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유적이리라 확신했다고 한다. 논밭이 넓게 펼쳐진 벌판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고인돌이 한눈에 보기에도 적잖은 크기였던 까닭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결과 서부지구에는 약 6만 7669㎡ 면적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돼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을 놀라게 했다. 남천변을 따라 긴 띠 형태로 277동의 집터, 68기의 작업장과 저장 구덩이, 9기의 돌널무덤까지 확인됐다. 당시에 발굴 조사원들을 압도했던 고인돌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도 발견된 그 자리에 보존되고 있다. 경산 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공원 내 길이 320㎝, 너비 250㎝에 높이는 160㎝에 이르는 무게 5톤 이상의 커다란 바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고인돌 아래에서는 매한가지 돌로 제작한 널이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화살촉과 돌을 갈아서 만든 칼이 함께 묻혀있었다. 돌널 속에 안장된 이는 아마도 용감무쌍한 전사였거나 옥곡동 일대를 주름잡던 당대의 호걸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고인돌 부근에는 원래 더 많은 고인돌이 떼를 이뤄있었던 것 같다. 발굴조사 당시에도 고인돌 주변으로 돌널무덤이 5기 추가 발견됐는데 돌널의 제작 방식과 형태 등이 흡사해 같은 집단 사람들이 연속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뿐만 아니라 택지지구 전체에서도 4기의 돌널무덤이 더 조사됐으니 최소한 10여 기 넘는 고인돌이 집단적으로 남천변에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다만 문화재 조사가 이뤄질 당시 옥곡동에는 잘 개간된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다. 워낙 부지런했던 지역 농사꾼들이 생업을 위해 돌들을 깨고 옮기는 등, 땅 위에 드러난 고인돌을 야무지게도 없애버렸으리라.   전국의 숱한 고대 유적들이 모두 겪는 일들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고인돌이라도 워낙 큰 덩치 덕분에 남아있어 준 것이 천운이라 할 만하다. ◆ 남천면 삼성리 고인돌군대한민국은 전 국토에 약 3만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펼쳐져 있어 가히 ‘고인돌의 나라’로 불리기 족하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밀집도인데 사실은 놀랍게도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가량이 우리 땅에 있다. 경산시에는 그 중 약 253기 정도가 고인돌로 확인됐는데 이는 전문 연구자들이 공식 보고한 수량일 뿐이다.   최근 수십 년간 이뤄진 도시화, 농경지 구획정리 과정에서 숱하게 사라졌을 고인돌까지 고려하면 경산 지역에만 300~400기는 족히 넘는 고인돌이 있지 않았을까. 이는 경상북도 내에서 인근의 청도군과 함께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그만큼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농사짓고 집단을 이루며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는 의미일 터이다. 옥곡동 고인돌처럼 5톤이 훌쩍 넘는 바위를 들어 올려 무덤 위에 안치하고, 기념물을 제작하는 대역사는 그야말로 수많은 지역 주민의 힘이 결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상 고인돌 제작은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세리머니에 해당한다. 2000 년 전의 시대에 고인돌을 제작하려면 널을 제작하는 석재 가공업자, 수송업자, 단순 인부 등은 물론 이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관리자, 재정 담당자까지 동원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혹은 지배자)의 권력이 뒷받침돼야 했다.   이를 검증이라도 하듯 옥곡동 마을 유적에서는 거대한 고인돌과 함께 30여 동의 집터가 함께 모여있는 ‘조직적’ 마을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30여 가구가 모인 마을이 옥곡동에만 있었을 리 만무한 터 경산시 일대에는 일찍부터 오목천·남천 등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짐작된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가능했다니, 옥곡동 일대가 지금 도시민들의 주거지로 각광 받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옥곡동 삼의정, 임진왜란 의병 상천(上川) 정변함(鄭變咸)17세기 영남을 대표했던 관료학자 정경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산과 같은 작은 고을의 창의가 여러 고을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초계정씨 경산 입향조인 정연(鄭烟) 5대손 정변함의 창의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동산(東山) ‘경산시 남천면 협석리’에 머물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해 고을이 텅 비자 동생 등과 함께 가동(家僮) 및 장정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다. 경산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첫 사례였다.   형제가 고을의 다른 인사들과 망월산(望月山)과 금성산(金城山)에 진을 치니, 왜군들이 함부로 경산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정변함 등은 이후 조정의 명에 따라 의병 부대를 성주 사원(蛇院)으로 옮겼고 사원전투에서 지인 박응성이 순절하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곽재우 부대에 종군했다. 1596년에는 팔공산회맹에 참여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의 군공을 인정해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사우(士友)들과 함께 고산서당 건립에 참여하는 등 향촌에서 학문 활동에 매진했다. 송시열의 10대손 송증헌(宋曾憲)이 이들 형제의 임진왜란 행적을 ‘정씨삼의사전(鄭氏三義士傳)’으로 남겼다. 해방 후인 1947년 후손들은 선조 정변함을 추모하기 위해 삼의정(三義亭)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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