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은 정월대보름 날이다. 어릴적 추억으로 이날은 아침 일찍 대바구니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오곡밥을 얻어 먹었고 떼를 지어 다니며 마을 벌판이나 강가에 달집을 짓고 장작을 얻어 달집을 채웠다. 동녘에서 달이 떠오르면 달집에 불을 지폈고 동네사람들이 모두다 모여 한해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어 벌어지는 지신밟기와 쥐불놀이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정월대보름은 우리나라 민속놀이 200여종중 40종이상이 몰려있다. 그만큼 비중이 큰 명절이다. 달의 움직임이 표준인 농경사회에선 첫 보름이 농경의 출발점이었다. 농사꾼과 머슴들이 긴 겨울에서 벗어나 농사준비에 들어가는 것도 이날이 기준이 된다. 해가 양(陽)으로 남성을 인격화한 것이라면 달은 음(陰)으로 여성을 상징한다. 출산을 의미하고 물과 식물도 음의 영역이다. 대지와 결합하여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이다. 마을마다 지내는 동제의 절반이상은 여신이다. 줄다리기도 암줄과 숫줄 을 걸어 클라이막스를 이루는데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온다고 한다. 달이 여성을 상징하고 농경사회가 중심을 이룬 사회의 세시풍속이다. 한해 풍년농사를 위해 보름 하루전날엔 온집안에 불을켠다. 마치 섣달 그믐날 수세( 守檅)처럼. 행사도 다양하다. 약밥과 오곡밥을 지어먹고 묵은 나물과 복쌈으로 찬을 만든다. 부럼깨기와 귀밝이술로 액운을 막고 더위를 팔기를 한다. 누구든지 이름을 불러 쳐다보면 “내더위 다 가져가라”며 소리치며 깔깔거리던 추억이 새롭다. 기풍, 기복행사로는 볏가릿대 세우기와 복토훔치기가 있었고 용알뜨기와 다리밟기, 나무아홉짐지기등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지방에는 없어지고 일부지방에서 명맥만 잇고 있다. 달집을 태우면 헌옷과 겨우내 갖고 놀았던 연을 태워 새출발을 다짐했다. 제의와 놀이로는 지신밟기, 별신굿, 안택고사, 용궁맞이, 쥐불놀이, 사자놀이, 들놀음, 오광대 탈놀음, 농악놀이가 이어졌다.
이렇듯 대보름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한해농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머슴들에겐 한해 세경을 결정하고 부칠 논을 정해 일년농사계약을 하는 싯점이다. 소작농들도 지주들을 찾아가 영농계약을 하고 풍년농사를 다짐한다. 각종제례로 지모신인 달에게 안녕과 풍요를 비는 날이다. 그래서 절기중 가장 중요한 날로 꼽힌다. 대보름의 뜻은 그야말로 풍요의 원점이요, 출발점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대보름행사도 대부분 취소됐다. 구제역으로 경북도내 전체가 홍역을 앓고 있어 예년처럼 행사를 벌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을 폭설가지 내려 주위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 울진의 대보름행사는 관광상품화되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지만 올해는 그것마저 볼 수 없게 돼 지역상가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한해농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경북은 전국 어느지역보다 세시풍속이 잘 보존되어 잇는 지역이다. 옛것에서 전통을 배우고 오늘에 응용하는 지혜는 꼭 필요하다. 대보름행사는 한해농사를 다짐하는 날이란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요즘은 마을단위의 행사도 활발해 지역민들의 단합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 농악대를 만들어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를 하고 보름날을 기해 친목을 다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따라서 대규모 달집태우기행사는 자제하더라도 외부인의 왕래가 없는 마을단위의 달집태우기행사는 매우 바람직하다. 마을들판이나 냇가에 달집을 지어놓고 세시풍속을 즐기는 것은 아름답다.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행사는 서로에게 걱려가 되고 새 힘이 솟게한다.
폭설이 내려 교통이 통제되고 농작물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그러나 건조한 날씨로 인해 당분간은 산불걱정을 잊게 됐다.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로 한해의 액운을 날려버리고 새출발하면 어떨까. 올해의 보름달은 유난히 밝고 높이 솟았으면 좋겠다.
변 린(객원논설위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