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다녀가고 싶은 곳이다. 상당수는 중고교 시절 수학여행지로, 신혼여행지로 다녀간 경험이 있다. 외지인의 눈에 비친 경주는 동경의 대상이다. 도심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신라의 문화유적과 웅장한 왕릉군, 현대와 과거의 역사와 문화가 조화를 이뤄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된다.
그러나 정작 경주시민들은 외지인들의 이런 동경의 눈초리에 냉소적이다. 전국 어느 도시보다 규제가 많은 곳, 걸핏하면 고도제한에 지구지정으로 집도 마음대로 못 짓는다.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와 문화재청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곳이 경주이다. 관광산업이 미래 성장동력이라고 하지만 서민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빗대어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경주시민들의 자조적 반응이다. 그래서 경주시민들은 우울하다.
경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도시이다. 서울에 조선 5백년의 문화유적과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면 경주에는 찬란했던 천년신라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왕릉과 첨성대, 안압지, 포석정, 불국사와 월성 등 시가지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물만으로도 신라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경주이다. 당연히 지키고 가꿔야 할 선조들의 유산들이다. 시민들은 그러한 문화적 유산에 자긍심을 가지며 온갖 제약에도 참고 견디는 인내를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취하고 있는 정책은 시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19년간 표류하던 방폐장을 시민들은 경주에 유치했다. 지역의 낙후를 방폐장 유치로 극복해보자는 뜻에서 였다. 정부는 방폐장 건립지역에 많은 혜택을 제시했고 전국 어느 지자체도 선뜻 나서지 않는 방폐장 건설을 경주시민들은 유치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때 약속한 각종 국책사업은 지지부진,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안정성 확보없는 방폐장공사만 지역민들의 반발에는 아랑곳 없이 진행하고 있다. 방폐물의 불법반입마저 강행하고 있어 시민들은 속았다는 감정마저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시의회와 시민단체들은 무수히 시정을 요구하고 관계기관에 개선을 촉구해 왔다. 경주시민들이 느끼는 절박감에 비해 정부의 시각은 싸늘했다. 불법은 없으며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국책사업의 지연은 예산상의 문제일 뿐 변한 것은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시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주시민들이 국책사업을 촉구하는 1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인 것도 그러한 문제에 대한 발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부요로에 시민들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고 실천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30만 시민중 10만명이 서명했으니 결코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포퓰리즘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영달을 위한 것도 아니다. 정치적 계산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순수 시민들의 뜻이 담긴 호소이다. 그 방법 또한 온건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국책사업의 속도감 있는 진척을 보여 달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이제는 묵은 문제에 대해 정부가 답 할 때이다.
월성원전의 수명연장은 밀어 붙이기 식으로는 안 된다. 일본원전의 참사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안전사고까지 계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납득할 수준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수명연장은 아예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 방폐장도 마찬가지이다. 저단위 폐기물이라고 불법매립은 안 된다. 안전불감과 방폐장의 불법운영은 위험을 키우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방폐장 유치지역 지원사업은 위험을 담보로 한 지역민의 고뇌가 담긴 사업인 만큼 가시적이어야 한다.
사실 천년고도와 원자력도시는 맞지 않는 컨셉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러한 부조화를 조화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경주시민들의 인내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속았다는 생각을 가질 빌미를 만들어서도 안 된다. 국책사업 촉구 10만 명 서명은 존중되어야 한다. 경주시의 현안에는 시민의 몫이 있고 정부의 몫이 있다. 정부는 제 몫을 다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