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아름답다. 심심산골에 홀로 피어 보는 사람이 없는 들꽃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이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먹거리로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오랜 옛날이 아니다. 그 시절, 우리의 봄날은 정말 먹거리가 없어 ‘잔인한 세월’이었다. 갈무리해 두었던 양식이 바닥나 먹거리를 찾아 헤매던 시절이었다. 채 아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베어내 죽 쑤어 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단물을 빨던 시절이었다. 찔레꽃 하얀 잎, 진달래꽃, 아카시아꽃, 감꽃은 훌륭한 먹거리였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그저 그만이었다. 꽃으로 배를 채워 변비에 걸리기 일쑤였지만 달리 먹거리가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도 학창시절 물로 배를 채워 허기를 달랬던 경험이 있다.
꽃이 꽃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빈곤에서 벗어난 이후였다. 비로소 꽃의 아름다움이 느껴진 것이다. 진달래 꽃말이 ‘사랑의 기쁨’이고 아카시아는 ‘숨겨진 사랑’, 찔레꽃은 ‘우정’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며 감상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그래서 어버이 날 자식들이 가슴에 달아준 꽃 한송이에 쓴 웃음을 짓는 게 우리의 기성세대들이다.
가난을 대물림 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인식이었다. 더욱 뼈빠지게, 일밖에 모르며, 출세를 위해, 돈을 벌기위해 앞만 보고 살아왔다. 새벽달 지기도 전에 일터로 나가 수출역군, 산업역군 되고, 저녁 별 창공에 빛나면 지친 몸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날 젊은 세대들이 돈 모아 자가용부터 사고 휴일이면 레저생활 하고, 노동조건 개선, 삶의 질을 외쳐대는 좋은 세상 만난 것도 이 들이 손톱이 닳고 등이 휘도록 일해 일궈 낸 터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꽃보다 쌀이 중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치인들은 뒷갈망 못 할 언어유희와 끝간데 없는 정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 끼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에게는 꽃보다 쌀이 아름답다. 쌀을 전해 주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생김새와 옷차림이 아름다운 것 ‘겉 멋’이 아니라 행동과 마음 씀씀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지만 가진 것을 나누고 소외된, 덜 가진 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행동이 걸태질 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보다 훨씬 아름답다. 갖추지 못했음에도 높은 벼슬하며 국민을 속이고 입신양명만 꿈꾸는 사람들과 비길 바가 아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주지만 이들은 우리를 귀맛나게 한다.
최근에는 꽃과 쌀을 바꾸는 사람이 늘어나 우리사회도 살 만 하구나 하는 뿌듯한 기쁨을 느낀다. 옥탑 방에 살면서 이웃을 돕는 사람, 폐품수집으로 모은 돈을 복지시설에 기부하는 사람, 평생을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사람, 자신의 재능을 제공하는 사람, 소득의 상당 부분을 지구촌 빈민구제에 쾌척하는 연예인들, 모두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학교급식을 두고 실시한 서울시의 찬반투표는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문제가 많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는 보편적 복지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의식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무한정 고삐 풀린 복지를 추구해선 안된다. 학교급식 정도는 시민들의 뜻에 따라 시행하되 사회전반에 걸친 보편적 복지는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치열하고 치밀한 고민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시 가난살이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국민적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이제는 복지의 틀을 바꿔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울시의 이번 투표가 어떤 결론을 도출해 어느 일방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사회는 분명 복지를 지향해 나가야 하지만 그 속도에 대해서는 더욱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꽃과 쌀의 조화로 귀착돼야 한다. 모든 사람이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쌀에 대한 궁핍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복지도 조화와 균형이 그 출발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