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다. 아직도 한낮 폭염은 계속되고 있지만 아침, 저녁 시원한 바람은 가을의 전령인양 삽상한 기운을 북돋운다. 한껏 수밀도를 올린 곡식과 과일은 점차 단맛을 더해가는 시기이다. 점차 황금색을 띠면서 농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늘은 점차 높아지고 수명을 다해가는 귀뚜라미, 매미소리는 한결 구슬프게 들린다
고추수확이 한창이다. 봄날 이상저온과 6월부터 시작된 장마, 국지성 집중호우와 맑은 날보다 비오는 날이 많았던 지난 여름을 뒤로 하고 고추가 발갛게 익어가고 있다. 시골집마다 고추말리는 풍경이 정겹다. 농부들은 모처럼 목돈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에 가슴이 부푼다. 올해는 작황부진으로 고추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농촌현지에서도 마른고추 한근(600g)에 1만7천원을 홋가 한다. 그래봤자 생고추 5~6kg은 따서 말려야 한근을 맞추지만 밀린 영농비를 정리하고 남으면 다행이다. 봄부터 가슴 졸이며 기울여온 정성에 대한 부담이 지금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고추가 익어가는 이 계절에 들려온 교육감선거를 둘러싼 돈거래는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농부가 고추 500~600kg을 따서 건고추 백근을 생산하면 생기는 총수입은 170만원, 여기에 농약값과 영농비를 제외하면 송에 쥐는 돈은 절반도 안 된다. 그런데 2억원이라는 돈이 교육감후보를 사퇴하는 댓가로 건네졌고 앞으로도 더 많은 돈이 건네지기로 약속했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농삿군의 시선에서 보면 등이 휘도록 일해 손에 쥐는 돈이 겨우 몇백단위인데 몇억이라니 이는 상상할 수 없는 다른 나라의 화폐단위이다.
더욱 실망스럽고 우울한 것은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감선거에 밀실야합이 있었고 그 댓가로 돈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과거의 교육정책을 부인하고 개혁을 내세우고 있는 진보를 표방한 무리라는데 한 번 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건네받은 박교수는 후보단일화 이전 소요된 선거비용이 14억여 원에 달했다고 한다. 후보를 사퇴함에 따라 보전받지 못하게 된 돈을 곽교육감이 보전해 주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인양 표적수사라며 반발했지만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 금품수수는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자 이제는 댓가성이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연민의 정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도대체 댓가성은 무엇이고 연민의 정은 무엇인가. 도시의 경제규모를 농촌에 비할 바 아니지만 고추 몇근을 팔아야 2억원을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뼈빠지게 번 돈을 연민의 정으로 남에게 줄 수 있는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우리나라 법은 굳이 댓가성을 논하고 그것이 법망을 빠져 나가는 구멍으로 존재토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인가. 빚을 내어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고 돈을 쾌척하는 사람이 없듯이 이 돈 저 돈 끌어다 뭉칫돈 만들어 남에게 건네면서 댓가성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교육감선거에는 30억원이 넘는 선거비용이 든다고 한다. 물론 당선되면 선거비용을 보전받지만 그전에 미리 이만한 돈을 마련해 선거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남의 돈을 끌어 오든지 아니면 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선거자금의 대출 또한 불법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중도에 하차한 후보는 90명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공탁금등 선거자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어떻게 보전했는지 궁금하다. 선거제도가 불법을 낳고 부정을 양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의 공직자 선거법이 바뀌어야 한다. 금권선거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제도화하고 선거기간중 후보단일화도 명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금품이 오간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다.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부담하는 것은 그만큼 공직선거를 깨끗하게 치러자는 의도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교육감선거는 수십억원을 들일만큼 경합을 요하는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옛날로 돌아가든지 러닝메이트제도화 해 선거비용을 줄이고 야합과 불법을 방지해야 한다
하늘이 성큼 높아지고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중추가절이 오고 있지만 서울시 교육감사태는 농민들의 영농의욕을 떨어뜨리고 무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래도 한낮 땡볕에 사래긴밭에 고추따는 농민들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