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5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입양된후 대학을 중도에 그만둔 파란많은 인생을 살아온 그가 오늘날 인류를 IT시대로 이끈 과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에게 붙어있는 숱한 수식어가 그의 업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디지털 시대 새 아이폰스타일을 창조한 인물, IT업계의 전설, 이 시대 최고의CEO,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찬사가 항상 그의 이름앞 수식어로 붙어 다녔다.
그가 창설한 애플사는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네 번째 사과로 불릴 만큼 우리의 21세기를 변화와 격동으로 몰아녛었다.
그 첫 번째 사과가 이브의 사과였다면 만유인력을 발견한 동기를 준 뉴턴의 사과가 두 번째, 폴 세잔의 그림에 나타난 사과가 세 번째이고 전화기와 디지털 카메라,MP3플레이어,컴퓨터가 손바닥안에 들어오는 아이폰을 출시한 애플사의 한입 배어먹은 모양의 사과로고가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네 번째 사과라는 것이다.
그는 개인용컴퓨터를 상용화한 인물로 손꼽히며 최근 아이폰을 창시함으로써 포스트PC의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PC와 아이폰의 공존이아니라 아이폰시대를 선언해 PC산업의 급격한 사양화를 몰고온 그야말로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5년 처음으로 ‘키트’라는 PC가 세상에 나온 이듬해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를 창설하고 개인용 애플I을 출시한다.1984년에는 마우스가 있는 매켄토시 컴퓨터I을 출시하면서 컴퓨터업계의 선두주자로 두각을 나타낸다. 애플의 두번째 이노베이션은 2007년 출시한 스마트폰인 아이폰이다. 그것이 포스트 PC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컴퓨터의 상용화는 인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자동화는 물론 전세계 움직임의 실시간 정보, 컴퓨터 검색을 통한 지식의 공유, 일상생활의 자동화 시스템, 재택근무도입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급성장은 IT산업에 힘입은 바 크다. 지금은 정보통신 최강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해외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모두가 변화하는 세계추세에 발빠르게 대처한 결과였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지만 스티브 잡스의 성공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정말로 불우한 환경속에서 자랐다. 미혼모의 태생으로 어릴때 입양됐고 대학을 마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고 주저않고 그 길을 선택했다. 오늘날의 IT산업이 단순한 과학기술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근간인 인간성과 과학이 융합하는 융합학문으로 성장 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IT혁명은 인문학의 눈부신 발전은 물론 융합학문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좆겨났으나 자문역으로 재기했고 나중에는 CEO로 권토중래, 인류의 삶의 질을 풍족케 했던 인물이었다. 말년에 췌장암과 간질환으로 투쟁생활을 했으나 그의 사망소식에 세계인들은 한목소리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ipad가 isad로 변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애플의 추도 메시지처럼 그는 우리나라 IT산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통신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끊임없는 경쟁과 기술개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죽음이후 IT업계의 변화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변화의 중심에서 그 산업의 핵으로 중심을 이동할 채비도 갖춰야 한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우리가 다잡아야 할 현실이다.
한 인간의 선각자적 행보가 인류의 삶에 이토록 많은 영향을 준적이 일찍이 드물었다. 누가 뭐라해도 그는 21세기의 가장 돋보이는 총아였다. 촛점은 그의 죽음이 IT의 종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IT산업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그 끝이 어디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그의 죽음이 또다른 IT의 이노베이션을 부르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한 선각자의 죽음을 접하면서 변화의 무상함과 닥쳐올 회오리바람을 함께 예감하는 것은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너무나 막중했던 까닭이 아닐까.
변 린(객원논설위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