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연평도가 북한으로부터 피폭을 당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전 국민이 경악했던 그날의 참담했던 현장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연평도는 겉보기에는 다시 평온을 찾은 듯 하다. 올해는 꽃게잡이가 풍어를 이뤄 어민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 졌다. 포격후 파손된 건물 239채는 모두 보수됐고 새로 32동의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대피소 7곳이 새로 건립돼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두께 1m가 넘는 방호벽에 한꺼번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군 시설도 강화됐다. 전차, 다연장포, 코브라 공격헬기, 링스헬기등 전에 없던 장비가 보이기 시작했고 Kㅡ9자주포와 최신 레이더망도 보강됐다. 당시 폭격으로 부상을 당했던 16명의 해병중 8명은 전역했으나 5명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다시 원대복귀, 바다를 지키고 있다. 당시 북한의 폭격에 맞서 북쪽에 포로 대응사격했던 해병2사단 연평부대 7중대도 여전히 당시의 중대장 지휘아래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고 그날의 악몽에 이를 악물고 있다. 겉보기에는 풍어로 꽃게 파시를 이루고 관광객이 늘어나 활기에 찬 모습이다. 그러나 연평도 주민들은 지금도 그날의 피폭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밤잠을 못이룬다. 외상후 스트레스라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연평도는 피폭이후 인구가 오히려 늘어났다고 한다. 8,665명이 거주, 사고당시 보다 337명이 늘어났다. 관광객도 28%나 증가, 연평도를 찾으며 호국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평도 피폭은 우리의 대북경계심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젊은이들이 해병대를 앞다퉈 지원하는 붐을 일어켰고 해외에 있던 동포들이 자원입대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매너리즘에 젖어 있던 우리의 안보태세도 강화돼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기준도 강화됐다. 방어위주에서 이제는 도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적극적 응징으로 강화된 것이다. 어쩌면 연평도 피폭은 우리의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일대 전기가 된 것이다. 연평도 피폭 1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날을 잊어선 안된다. 국토방위에 나섰다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도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는 장병들, 국가유공자 지정을 약속해 놓고도 지지부진한 뒷처리, 당시는 무엇이든 해줄 것이라고 다짐했던 약속에 대한 뒷갈망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이런 억울한 희생이 없도록 우리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북의 도발을 사전에 막는 안보태세이다. 부상을 당하고도 다시 원대에 복귀, 두번다시 그들의 도발에 당하지는 않겠다며 전우애를 다지고 있는 장병들의 의지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연평도 피폭은 영원히 기억돼야 한다. 북한은 연평피폭 1주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상투적 흑색선전과 허위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아직도 일련의 사실을 남쪽의 자작극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으로 봐 도발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안보태세를 더욱 강화하고 북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응징해야 하는 이유이다. 북한은 김일성탄생 100주년인 내년을 강성대국의 결정적 전기로 삼고 있다. 그들의 강성대국은 여전히 선군정치를 근본으로 삼고 있다. 1997년 고난의 대행군과 1998년 사회주의 강행군도 선군정치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그들이 선군정치를 앞세우는 것은 군사강국으로 대미관계를 유리하게 이끌고 남북간 체제다툼에서 우위에 서려는 야욕 때문이다. 북한이 선군정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긴장상태를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최근 그들이 폭격기를 이용한 미사일 실험을 강행한 것도 선군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북자세도 연평도 피폭때의 긴장감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들과 인도적 교류와 지원을 계속할지라도 이유없이는 쌀 한톨도 지원할 수 없는 것이다. 꽃게로 파시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평온한 연평도는 우리의 철통방어로만 계속될 수 있다. 변 린(객원논설위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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