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라 한다. 그래서 눈이 보배라 한다. 성서에도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고 했다.
사회학자 볼테르는 “우리들은 눈이 둘 있다하여, 그만큼 조건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한 눈은 인생의 좋은 부분을 보는데 쓰여 진다. 선을 보는 편의 눈을 가리는 나쁜 버릇을 갖는 사람은 많지만, 악을 보는 편의 눈을 가리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눈을 마음의 창(窓)이라 한다.
한글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말에 자주 쓰이는 것 중에 ‘본다(보다)’ 라는 말이 아주 많다. 한 예로 가는 것을 가 본다를 위시해서 입어 본다, 먹어 본다, 살아 본다, 맞아 본다, 심지어는 죽어 볼래라고 한다. 안 보면 안되는 것일까? 안 보면 믿을 수 없을까? 어떤 사건이 일어난 과정을 설명하는데 실컷 듣고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 일 일어난 것을 봤느냐?고 물었을 때 보지는 못하고 들은 얘기라고 하면 신빙성이 결여되고 뭐 보고 얘기해야지 하고 일축하고 무시해 버린다.
중국고사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근원은 중국 전한시대 제9대 황제인 선제 때 서북쪽 변방 지금의 티베트 계통의 유목민족인 강족이 쳐들어 왔다. 유비무환이라고 이미 침략을 예견한 군사들이 필사적으로 응전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전쟁에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제임금은 토벌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그 군사를 총 지휘할 사령관에 76세의 고령인 조충국을 임명했다. 그는 일찍이 강족과 싸운 경험이 많은지라 임금이 물었다. “강족을 토벌하는 데 군사적 전략과 계책이 따로 있으면 말해보시오. 또 병력은 얼마나 필요 하겠오?”
조충국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무릇 군대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저를 직진 근처로 보내어 살피게 하옵소서. 작전은 현지를 살펴본 후에 아뢰겠습니다.” 이 말에 선제임금은 기꺼이 승낙했다.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조충국은 기병(騎兵) 보다 둔전병(변방에 주둔시켜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게 하던 군사)을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씀을 올렸다. 그후 그러한 군사작전이 채택됨으로써 강족의 반란도 수그려졌다고 한다. 그 말의 속 뜻은 무엇이든지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보는 것이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