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나 보좌관들이 판을 치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국회의 오소독스(orthodox)한 모습이라면 그런 오소독스는 파라독스(paradox)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파라독스는 일상의 개념을 깨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프랜시스 베이콘은 "가장 많이 고친 사본이 가장 부정확한 사본"이라며 문학에 있어서의 기교를 비웃는다. 조지 오웰은 그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는 파라독스로 변화를 촉구한다. 문학에 있어 파라독스는 '소란한 침묵', '고독한 군중', '군중속의 고독', '살아있는 죽음'과 같은 대립된 단어의 조합으로 그 의미를 강조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세계는 정말로 파라독스가 필요한 시절이다. 국회는 권위와 품위의 상징이다. 그들은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상원은 지금도 국회에 등원하면 하얀 가발을 쓰고 위엄을 갖춘다. 민의의 전당이어서 신성시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국회는 난장판이 되었다.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해머로 유리창을 깨고 문이 못질당하는 헤프닝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국회의원이 주가 되어야 할 곳에 보좌관이나 비서들이 진을 치고 상대방 국회의원과 몸싸움을 벌인다. 그래도 아무런 제제가 없다. 국회 스스로가 권위와 위엄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희롱 발언을 해도 아무런 징계가 없고 최루탄을 까도 속수무책이니 다른 행위를 정죄할 수 없다. 오소독스의 붕괴는 국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야당의 전당대회에서 옛날의 난닝구, 깍두기가 다시 등장해 폭력과 욕설로 난장판이 됐다. 여당의 중진 국회의원 보좌관이 뇌물을 받아 그들끼리 돈세탁을 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전형적 임기 말기적 현상이다. 예전보다 달라졌다면 국회의원보다 비서, 보좌관들의 권력남용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국회가 더 이상 오소독스한 집단이 아니라는 비아냥을 낳고 있다. 지금은 파라독스의 계절이다. 문학에서 왜 군중이 고독한지를 사유하고 요란한 침묵이 생겨났는지를 탐구하듯 우리의 현실정치도 파라독스한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보좌관, 비서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그들의 역할이 커져 그들로 인한 새로운 부패가 싹트게 된 것을 뒤돌아 보아야 한다. 국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자업자득이 아닌가도 자성해봐야 할 대목이다. 현실정치의 환골탈퇴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살펴 볼 일이다. 안철수, 박원순신드롬이 이유없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 자체가 오소독스를 깨는 파라독스이다. 지금의 현상이 집권말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레임덕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다. SNS의 보편화는 성역이 없는 세상으로 빠르게 이행하고 있다. 누구나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트위터나 인터넷등을 통해 거침없이 제시할 수 있고 공감이 되면 수많은 팔로어들이 뒤를 따르며 메시지를 퍼다 날라 순식간에 거대한 여론의 집단을 이루는 세상이다. 닫힌 세상에서 열린 세상으로의 이행이 가져다 준 산물이다. 난닝구가 누구이고 경찰서장을 폭행한 자의 전력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 세상에 회자된다. 국회의원의 과거 행적과 지금의 노선을 비교해 보는 것도도 그러하다. 그래서 "검색하면 다 나온다"는 유행어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모든 역설은 오소독스가 제길을 잃고 파행을 치달을 때 양산된다는 것을 우리는 요즘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파라독스에 의해 변화하고 새질서를 모색해 왔다. 지금 우리의 국회와 정치가 그런 시절을 맞고 있는 것이다. 여당의 자각은 그런 의미에서 천만다행이다.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민심을 얻겠다는 자각이기 때문이다. 야당도 뭉치지 않으면 민심을 살 수 없다는 자각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행태는 안된다. 무슨 일이든 뒤집어 보면 해답이 나온다. 역지사지의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국회가 오소독스한 집단이 되고 정치가 제자리를 찾는데 꼭 필요한 사고의 출발점이다. 파라독스의 미학을 한번쯤 생각해보자. 변 린(객원논설위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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