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적 교육이라는 명제
전교조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꿈 많은 초등학교 학생에게 라는 만화책을 읽혀서 그들의 정신적 성장에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 한국이 과연 미국의 식민지인가? 그렇다면 왜 중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이 한국식 경제개발모델을 닮지 못해서 안달인가? 친일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이 아직도 이 나라 정치경제를 좌우하는가? 그리고 일제시대의 친일 재벌 기업들이 지금 과연 얼마나 생존해 있는가? 특정 정치인 한 사람을 잡으려고 친일파를 20여만 명이라고 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러다 보니 살판이 난 것은 국가적 반역이나 악질적인 친일분자들이었다. 친일파가 너무 많다보니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미래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들이 몰두한 일은 오로지 이미 60여년 전에 사라진 과거 친일분자를 잡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든 기관에 엉뚱하게도 일본 전문가가 책임자가 되기도 한다.
일선 교수나 교사들의 잘못된 교육 탓으로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보수와 진보를 극심히 혼동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적인 용어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진보와 보수(반동)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생산력의 해방,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모순 등의 매우 어려운 개념들이 있다. 쉽게 말해서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데 생산관계가 걸림돌이 되니 생산관계를 변화하는 생산력에 일치시키는 것이 진보라는 말이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이후 이 말들은 의미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말하는 진보라는 말 자체가 동적 개념으로 어떤 지향점이 있어야 하는데 소련이라는 진보의 실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를 혹평하고 자유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찬양하면서 ‘역사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졌다기 보다는 좀 더 현실화되고 타협적이며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형태로 변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이 유럽의 사회당 정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이미 중고품이 되어버린 마르크스의 개념에 주체사상이라는 이상한 꼬리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스스로를 진보라고 하는 이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반미에 동조하지 않고 북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람들을 보고 ‘보수골통’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진보나 보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다. 친북적이고 반미하면 그것이 진보인가? 그러면 북한 정권은 진보 정권인가?
▲ 보수반동의 국가, 저개발의 개발
현재의 북한은 마르크스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장 극렬한 보수반동이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체제는 봉건적인 요소를 매우 많이 가지고 있으며 마르크스가 말하는 생산력의 해방과정을 조금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 경제는 오히려 심화된 저개발 상태에 불과하다. 이른바 종속이론의 대가들이 중남미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지적했듯이 ‘저개발의 개발(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돈키호테적인 국가인 북한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경제적으로 북한은 심화된 종속의 상태이다. 북한은 사실상 중국의 1개의 성으로 전락한 상태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마르크스적으로 말한다면, 북한은 정치체제라는 상부구조가 하부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발전을 철저히 왜곡시켰기 때문에 역사의 추가 거꾸로 가고 있는 상태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수십만이 탈북자로 꽃제비로 떠돌고 있고 또 그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존의 한계상황에 놓여있다. 김정일 정권은 우리 5천년 역사를 통하여 어떤 폭군이나 전제군주도 그 처럼 많은 수의 자기 동포를 박해하고 파멸시키지 않았다는 진실만은 말해두어야 한다. 따라서 북한식의 정치경제 체제를 진보적이라는 말을 한다면 죽은 마르크스나 체게바라는 통곡할 것이다.
지난 5월 '진보정치 대통합'을 위한 대표자 연석회의가 결렬되었다. 민노당에서는 종북노선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의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 “21세기에 다 망해가는 봉건왕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 이건 정치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라고 비난했다. 그는 “도대체 21세기에 3대 세습과 인권문제에 대해 비판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심한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그런데 왜 또 나는 이 자리에서 말해야 하는가?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될 상황이 온 것이다. 이 시점에서 침묵은 무지(無知)가 아니면, 기만(欺瞞)일 뿐이다.
▲ 진보와 발전 그리고 교육
진보라고 할 때는 마르크스적 관점보다는 본래의 철학적 변증법적인 관점을 가지고 파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정(正)-반(反)-합(合)이 가지는 미래지향적인 속성을 파악하여 현재의 잘못되고 낡은 틀을 파괴하고 그 필요한 내용을 보존하면서 이를 극복하는 반(反)의 논리적인 내용을 잘 섞어서 미래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 갈 때를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로 사용해야 하면 된다.
진보는 발전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보는 발전의 역동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뮈르달(Myrdal)의 “발전이란 총체적인 사회 체계의 상향 운동(movement upward of entire social system)”이라는 견해는 매우 적절하다. 즉 발전이란 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제도, 사상, 질서 등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견의 다양성은 발전과 더불어 당연히 나타나는 것이지 오로지 하나의 견해만으로 세상을 보려고 한다거나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식은 곤란한 일이다.
현대 유럽에는 지금 우리가 겪는 사상적 갈등의 문제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가 성숙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상대의 장점들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대결을 통한 국민적 선택이 정치의 일반적 과정이 된 것이다.
우리의 경우 좌파나 우파는 그 분석방식이 서로 달라 상호 설득이 매우 어렵다. 유신독재와 5공화국의 시대를 거치면서 운동권은 더욱 좌편향되었고 여기에 북한정권도 크게 거들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무임승차했던 수많은 방관자 그룹의 존재도 한몫하였다. 이른바 진보좌파의 눈에 그들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이 이제 와서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인양.”한다는 것이다.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이 점 우리 모두 반성해야할 시점이다.
그래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지금의 북한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바로 내 형제, 자매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에 대한 단일한 기준(single standard)을 가져야 한다. 당장 눈앞에서 김정일 정권의 서해 해상 도발에 의해 젊은 이들이 죽어가는데, 월드컵 때문에 덮어두고 그 후에도 무시한다거나,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주니 북한동포의 인권문제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로 교육을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기 평생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내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我所不欲勿施於人)”고 했다. 이른바 종북 진보좌파 교사나 교수들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내 가족들을 데리고 북에서 살 자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유의지로 가서 북한에 가서 살면 될 것이다. 만약에 당신은 가기 싫은데도 학생들에게 종북 이념을 계속 가르친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왜 제자들에게 따르기를 강요하는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투쟁할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바로 북한이다. 북에 가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생존의 기로에 있는 동포들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념적 갈등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보다 적극적으로 갈등 해소를 위해서 교육적 기능을 회복하여야만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지역보다는 세계를 이야기할 시점이다.
최성해 동양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