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의 발굴작업이 시작된 것은 1976년이었다. 그해 6월부터 시작된 발굴은 1983년12월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난 진실은 놀라운 것들 이었다. 절터만 동서로 288m, 남북으로 281m에 달하는 동양최대규모였고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중 절의 중앙에 위치했던 높이 90m의 구층석탑과 장륙존장은 신라3보중 2보로 평가됐다. 보상화문전과 같은 뛰어난 와전류와 금동제 불상과 귀걸이, 거울등은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10cm미만의 불상은 당시의 우수한 조각솜씨를 그대로 드러냈다. 높이 90m의 목재로 된 구층목탑은 신라의 우수한 건축기술의 압권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황룡사 종과 황룡사장륙상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 이가람이 호국정토라는 이념에 맞게 건립된 절임을 입증하고 있다. 지금도 중문과 탑, 금당이 들어서 있던 자리에 주춧돌이 별 훼손없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불에 타 없어졌지만 저 유명한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던 곳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21세되던 해인 553년 월성동쪽에 새 왕궁을 짓기로 하고 습지를 메우던 중 황룡이 나타나 계획을 바꾸어 황룡사를 지었다고 한다. 공사는 569년에 완공돼 16년이 걸렸으며 이후 주존불인 금동삼존불을 574년에 봉안했다. 584년에는 금당을 세웠고 구층목탑은 645년에야 완성되었으니 온전한 가람의 위상을 갖추는데에는 무려 92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됐다. 황룡사는 고려 고종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탔으며 그후 긴세월 동안 찾는 이 없이 버려져 있었고 세인의 관심에서도 사라져 발굴이 시작되기 전 일부는 농토로 전용되는등 740년의 잊혀진 세월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라진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주춧돌이 원형에 가깝도록 보존되어 있었던 것과 구층목탑의 중심 주춧돌밑에 묻혀 있었던 사리함이 도굴꾼의 손에 넘어갔다가 되찾았다는 점이다.
황룡사의 복원은 천년고도 경주시를 역사도시로 자리매김하는 사업의 가장 핵심에 있다. 황룡사와 함께 그 사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감은사도 마찬가지지만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횡룡사의 복원이 단연 우선이다. 황룡사의 복원은 1983년 발굴이 끝난지 30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방치해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그런데 황룡사에 대한 기존연구성과와 향후 추진방향에 대한 포럼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황룡사복원 기초연구포럼이라고 한다. 이 포럼은 지난 2008년에도 한차례 열린 적이 있다. 그때는 황룡사의 역사문화적 가치의 재조명이라는 지극히 인문적인 범위였지만 이번에는 이에서 진일보한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분야까지 거론될 것으로 보여 기대가 되는 것이다.
경주는 우리나라 최대의 역사도시이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유물과 구조물들이 경주가 역사향기 그윽한 도시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1000년 왕국의 중심이라고 내세우기에는 뭔가 상징할 수 있는 구조물이 없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중국의 자금성과 진시왕릉 같은 엄청난 노예문화나 착취문화의 흔적이 아닌 순수한 우리의 것이면서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압축된 문화유산을 말하는 것이다. 황룡사의 복원이야말로 경주를 천년왕국의 수도로 알리고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완결이 아닐까. 건립까지 십수년, 거의 1세기에 걸친 긴 기간을 통해 마침내 완공을 보았듯 서두르지 않고 철저히 옛 것을 고증하고 당시의 양식에 맞게 당시의 예술과 사상을 그대로 담아내는 황룡사의 복원이 아쉽다. 황룡사의 복원은 우리나라 불교가 꼭 이뤄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정부가 앞장서야 할 일이다. 한류를 바로 세우는 일 중 핵심이라 할 것이다. 이번 포럼을 계기로 황룡사 복원사업이 구체화되었으면 좋겠다. 이는 경주뿐만 아니라 국가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욕심을 부린다면 차제에 감은사도 같은 맥락에서 검토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둘 다 호국가람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변 린(객원논설위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