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김용 다트머스대학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되어 화제다. 세계은행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백악관 건너편 라파예트 광장은 각지에서 온 백악관 관람객, 식후 산책을 즐기는 세계은행, IMF 근무자, 일광욕을 즐기는 백인들로 들끓는다. 한편에선 사진과 각종 주장을 담은 널빤지를 펼쳐놓고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슈별 시위대의 숫자는 많아야 두 세 명이고, 언제나 '묵언시위'다. 고함을 지르거나 다중시위를 벌이는 순간 건너편에서 예의주시중인 체격이 엄청나게 좋은 경찰이 잽싸게 달려들어 곤봉을 사정없이 휘두르거나 수갑을 채운다.
민족의 영웅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내려다보시는 광화문 사거리 동화면세점 앞 광장은 거의 매일 소음허용치를 초과하는 시위 구호와 노래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져 주변 건물의 근로자들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문이다. 시위대 주위에는 늘 전투경찰이 대기하고 있으나 그들보다 어리고 체격도 작아 보이는 데다 숫제 시위대를 등 뒤로 한 채 돌아서 '묵언경비'를 한다.
미국가면 교포들이 맨 먼저 하는 충고가 '절대로' 술병을 봉투에 넣지 않고 보이게 들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들이 반드시 술을 봉투로 싼 채 마시는 것은 술을 보이게 들고 다니거나 마시면 경찰이 달려와 수갑을 채우기 때문이다.
며칠 전 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광장. 꽹과리를 치고 밴드연주를 하며 판을 벌이던 시위대는 술병을 늘어놓고 손뼉을 치며 고성방가를 했지만 경찰은 그들을 외면한 채 뒤로 돌아서 있었다.
파란 불에서 노란 불로 바뀌는 순간 교차로를 잽싸게 지나면 어느새 경찰차가 뒤에서 사이렌을 울리고, 운전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핸들에 얹은 채 경찰이 다가와 운전면허증과 차량등록증을 내놓으란 지시를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다가오는 경찰에게 말하려고 차문을 열면 경찰은 총을 빼들고 "꼼짝마(Freeze)"를 외치며 수갑을 채우기 십상이다.
같은 경우 차문을 열고 다가오는 경찰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지거나 급기야는 경찰의 멱살을 붙잡아도 심지어 취객이 경찰서로 걸어 들어가 행패를 부려도 우리의 민주경찰은 속수무책이다.
토요일엔 오전영업만 하는 은행에 달려가면,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미국도 사람 사는 세상인지라 간혹 슬그머니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뒤에 서 있던 사람은 팔을 벌리고 어깨를 치켜세우며 "별 사람이야"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볼 뿐이다.
줄을 잘 서지 않던 우리도 은행에 가면 번호표가 있어 차례를 기다린다. 그러나 간혹 번호표 없이 창구로 다가가는 막무가내의 사람이 있다. 그럴 땐 대개 먼저 온 사람이 "거기, 줄 서세요"하며 나무라고 무안해진 그 사람과 양자 간에 고성이 오간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미국, 유럽에서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조용히 보험정보를 교환하고 헤어진다. 보험사가 사고경위와 사고부위 등을 보고 시시비비를 가려주기 때문이다. 경찰을 불러도 보험정보를 교환하라고 할 뿐, 언성을 높이면 경찰은 그 사람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그 사람을 격리시킨 채 조용히 말하는 사람 얘기만 듣는다. 자신이 잘못한 경우에도 상대방이 언성을 높이면, 경찰에게 언어폭행(harass)을 당했다 하고 경찰은 오히려 잘못한 사람을 보호한다.
이런 경우 우리도 예전과는 달리 싸우기까진 하지 않지만, 차량이야 밀리든 말든 길 한복판에 차를 세워둔 채 잘잘못을 따진다. 흔히 경찰을 부르고,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며, 경찰은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신경을 쓴다.
우리의 열정이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담보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 열정이 화내고 언성을 높이는 데에 이르고 그래야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스트레스 넘치는 현대생활은 피곤하다.
지난 주말 심야토론에 나온 토론자 모두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을 봤다. 우리도 목소리 큰 사람보다 목소리 작은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한가닥 기대를 갖게 한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법질서를 지킬 때 비로소 만개한다.
안홍철 인베스트코리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