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만산동 산74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북천임란전적지는 충렬사가 있고 이곳에는 임진왜란때 순국하신 상주목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의 경군과 사근도 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등 7분과 무명열사 800여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매년 양력으로 6월4일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분들은 왜군이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쳐들어와 임진왜란이 발발한 가운데 중앙군으로 급파된 60명의 관군과 급히 모병한 민병 800여명으로 구성되어 왜적의 주력부대인 소서행장이 이끄는 1만7000여명의 대군과 북천변에서 격돌해 모둔 순절한 것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7분의 위패는 무명열사의 위패와 달리 위패를 모셔놓은 단의 높이가 다를뿐만 아니라 7분에게는 초헌과, 아헌관, 종헌관이 술잔을 올리는데 반해 무명열사의 위패에는 마지막에 딱 한잔의 술잔만 올리는 것으로 제향이 끝나버리게 된다.
물론 관직에 있고 그 이름에 걸 맞는 순국을 했으니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하는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인 만큼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백성들의 순국 또한 어찌 거룩하다 하지 않을 수 가 있겠는가.
과연 그들이 800여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20배가 넘는 왜적의 대군과 맞서 싸우면서 살길을 도모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호국정신 외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이름 없이 쓰러져간 800여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주어야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본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데, 어찌하여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것에 귀.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가위기 상황에 직면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것을 기리는 충남 금산의 종용사와 칠백의총은 상주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 대해 성역화 사업을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종용사는 '대의에 따라 의연하게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으로 1592년 당시 충청도를 휩쓸고 호남으로 진군하던 1만5000명의 왜군을 금산성 연곤평에서 막아내고 장렬하게 순절하신 중봉 조헌 선생과 그 막료들, 그리고 영규대사 등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다.
칠백의총은 전투가 일어난 지 3일 후에 서로 뒤엉켜 돌아가신 시신을 모두 수습하여 인근 야산의 한곳에 함께 모신 합동묘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들이 순절한 11년 뒤인 1603년(선조 36)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를 세우고, 42년 뒤인 1634년(인조 12)에는 지역 유림들이 순의단을 설치하여 제향을 올리다가 1647년(인조 25)에는 사당을 지어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그들이 돌아가신 지 70년이 지난 현종 4년(1663)에 드디어 조선 정부는 종용사라는 사액과 토지를 내려 대대로 제사를 받들게 했고, 종용사에는 조헌 선생과 칠백의사 이외에 눈벌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선생과 그 막좌 및 사졸의 위패도 모셔져 있는 점에서 상주와는 역사적 인식에 있어 배워할 것 같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700명이 한 분 한 분 누구였는지를 밝히고 후세에 정성스럽게 알려야 한다는 뜻이 모아지고 있고, 밝혀진 250여 분들의 성과 이름을 기념비에 새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감대를 얻고 있다.
과연 상주는 어떠한가. 800여명의 민초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는 단의 높이까지 낮춰 위패를 모신것도 모자라 술잔도 마지막에 한잔을 마지못해 올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역사적 인식이 그만큼 졸렬하고 유치하다 못해 역사적 사명감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고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잘못들이 누구 한사람의 억지주장이나 몇몇 목소리 큰 사람들이 주도 했다기 보다는 상주시민 모두가 무관심해서 지금까지 이분들에 대한 예우가 소홀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환으로 위패봉안에서부터 제향은 물론이고 이분들의 역사적 의의를 찾는 일련의 사업들이 추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황창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