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편집국장)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정착한지 3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나는 틈만 나면 고향의 산천을 샅샅이 뒤지면서 그동안 못 맡았던 고향의 흙냄새를 맡았다. 골목이 나서면 차에서 내려 손금같이 뻗은 길을 밟았고, 산과 내, 언덕 위의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살갑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세상 어느 곳에도 내 고향 경주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산길을 걷다가 문득 나타나는 오솔길 막다른 곳에 돈 냄새 하나 나지 않게 뼈만 앙상한 절이 있고, 정갈하게 비질한 절 마당에 복슬강아지 한 마리가 오종종 걸음으로 작은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고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릉원 주변의 한옥마을이다. 어린 시절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그 마을은 이제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체코의 체스키크롬로프나, 중국 호남성의 봉황고성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냄새와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삶터다. 유네스코가 왜 이곳을 아직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곳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동안 경주의 관광은 보문에서 자고 나와 불국사와 석굴암을 돌아보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 둘 게스트하우스가 만들어지고 관광패턴도 다양해졌다. 인근의 대릉원과 첨성대, 반월성과 계림, 교동 한옥마을에 이르기까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코스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곳을 걷는 여행자들의 수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현대적 여행 패턴이 경주에서도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곳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제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마을을 가꾸지 않으면 자칫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동네로 변할 수 있다. 방콕의 카오산로드나 카트만두의 타멜거리, 델리의 파하르간즈처럼 여행자들이 밀집하는 곳으로 정착하더라도 경주의 한옥마을이 가지는 전통적 매력을 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에 경주시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관리를 한다고 하지만,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개발해야 한다. 여행자들도 편안하고 우리의 전통미도 지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한다.
경주를 찾는 이들은 중국이나 여행대국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관광콘텐츠에서 벗어나 고즈넉하고 정겨운 신라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려 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경주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원이다. 고도를 걷는 호젓한 즐거움은 세계 어디를 가도 경주만큼 적합한 곳이 없다. 경주는 경쟁력 있는 관광자원을 숨겨두고 있었으며 이제는 그것을 제대로 꽃피울 때다.
대릉원 주변 한옥마을을 다시 걸어보자. 그 좁은 골목길 한옥 담벼락에 피어난 각종 꽃들은 첫사랑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처럼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자칫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이 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낯선 곳으로 여행 온 관광객들의 가슴에 끊임없는 행수를 전해준다.
매체가 발달한 시기에 경주는 본격적인 관광 홍보에 나서야 한다. 경주를 다녀간 여행자들이 꾸며놓은 블로그를 보다 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관광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서울이나 제주의 평범한 관광자원보다 훨씬 더 경쟁력을 가진다. 우리가 가진 보물의 값어치를 제대로 매기지 못한 채 우리는 그동안 경주를 방치해 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새롭게 가꾼다면 머지않아 경주는 8세기 동아시아 문화중심지였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