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편집국장) 중국 호남성에 토가족 전통 마을인 왕촌이 있었다. 이 마을을 지금은 부용진이라고 부른다. 1988년 ‘부용진’이라는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부용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상영된 중국영화다.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에 상영됐다. 영화의 내용은 부용진이라는 가상의 농촌에서 살아가며 쌀두부집을 운영해 부자가 된 호음옥이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우파분자인 ‘신부농(新富農)’으로 몰려 남편은 처형되고 자신은 마을 청소부로 전락한다. 또 한사람의 우파분자로 몰린 지식인 진숙선도 청소일을 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그 와중에 정분이 난다. 두 사람이 결혼하려 하지만 당이 반대했고 아이가 생기자 진숙선은 감옥으로 간다. 아이가 태어나고 문화혁명이 끝나자 진숙선도 풀려나고 호음옥은 다시 쌀두부집을 경영해 행복하게 살아간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쌀부두집은 부용진의 명물이 됐다. 부용진의 113호집은 바로 영화 속에서 호음옥이 경영했던 쌀두부집으로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역(逆)스토리텔링이다. 기존의 마을에서 내려오던 이야기를 영화가 소재로 써먹은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나오던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이 생업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부용진이라는 마을의 쌀두부집은 113호뿐만 아니다. 손바닥만한 마을에 최소한 서른 집은 넘게 쌀두부를 판다. 그리고 모든 집에는 정종(正宗:우리말로 원조)이라고 써붙였다. 부용진을 관광하는 여행자들은 쌀두부집의 난립에 다소 어리둥절해 한다. 오래된 마을의 정취를 느끼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옛건물은 대부분 간판을 걸고 좌판을 벌여 쌀두부를 판다. 부용진을 관광하는 것은 마치 쌀두부를 먹으러 가는 행위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경주를 돌아보자. 도시의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빵집이다. 도시 전체에 빵집은 수도 없다. 이름도 갖가지다. 황남빵, 찰보리빵, 경주빵, 주령구빵. 이들은 도시 곳곳에 판매점을 내고 커다란 간판까지 달았다. 그리고 모두 원조임을 강조한다. 경주를 처음 여행 온 사람들은 경주가 마치 ‘빵의 도시’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일은 불과 십여 년 사이에 생겨났다. 오랜 역사를 가진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도 이렇게 호들갑스럽지 않다. 중국 시안의 대표적인 명물 음식인 ‘교자(餃子:만두)’는 덕발장(德發長)이라는 식당 하나 정도만 유명하다. 터키 해안지역의 음식인 고등어 캐밥은 보스포러스 해협에만 집중돼 있다. 프랑스 음식의 백미인 푸아그라를 파는 레스토랑은 간판을 요란스럽게 치장하지 않는다. 배울만한 것들이다. 도시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체계적인 도시계획, 그 계획에 걸맞은 도시미관 관리, 시민들의 격조 높은 안목 등 다양하다. 여기에 필수적인 것은 절제미다. 경주가 가지는 미학적 가치는 천년 고도의 단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다. 경주를 찾는 외국인들과 외지 여행자들은 반월성과 첨성대, 내물왕릉 주변의 고분군을 비추는 야간 조명에 감탄한다. 은근하면서도 경주의 안정된 전통문화를 그 조명이 대변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만약 이 유적을 더 환하게 보여주기 위해 조명의 조도를 높였다면 사람들은 경주의 중요한 아름다움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빵집이 난립하는 도시 경주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빵집 업주들이 무분별하게 지점을 늘리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더 이상의 범람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행정이 나서야 한다. 모르긴 해도 경주에 넘쳐나는 빵집 가운데 상당부분이 불법운영 중일 것이다. 이들을 정리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천년고도 경주의 도시 이미지를 해치는 당면한 문제 중 하나를 크게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미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 경주는 그동안 수학여행지로 알려져 있는 지방의 조그마한 고도였지만 지금은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거액을 들여 세계문화엑스포를 이역만리 터키에서 개최하는 이유도 경주의 세계화를 위해서다. 앞으로 경주를 찾는 광광객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천년 문화를 관광자원화 하는 일은 식은 죽먹기다. 아무리 명성이 높아도 도시의 미관이 흐트러지면 뒷소문이 닫힌다. 가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더라는 말이 줄줄이 나와야 한다. 절제하고 아끼는 자세가 없다면 경주도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관광지에서 머물고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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