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 되면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지고 해지는 시간이 빨라진다. 같은 길, 같은 장소지만 전혀 느낌이 다르다.단풍이 물든 거리를 걷는 정취가 멋스러운 가을, 우리 눈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는 단풍이 나무들에게는 중요한 요소다.봄, 여름과 달리 가을, 겨울에는 빛의 양이 줄고 기온이 낮아지면서 광합성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나무들은 이를 대비하기 위해 월동준비를 해둔다. 먼저 나무는 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잎으로 물과 양분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엽록소는 햇빛에 파괴되고 엽록소와 결합한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된다. 아미노산이 축적돼 잎의 산도가 올라가면서 엽록소에 가려졌던 다양한 색소가 드러나면 단풍으로 물든다.나무이지만 이처럼 사계절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 역시 세상에 태어나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 것은 상식이다. 예순이나 일흔이 넘으면 머리에는 잔설이 내린다. 친구 중에도 절친하던 이들은 무엇이 그렇게도 급한지 대부분 이미 고인이 되었다.며칠 전 어느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친구는 몇 달 전부터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통화 중에 그 친구는 돈을 융통해 달라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몇 달 전에도 그 친구는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내게 돈을 융통해 갔고 내가 친구를 위해 밥도 몇 번 샀다. 그 돈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빌려준 것은 아니다. 나는 친구에게 “요즘에 와서 나도 형편이 어려운 일이 있어 여유가 없으니 한 번 알아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세상을 살아오면서 사귀고 함께하는 친구는 여러 종류가 있다. 친구를 일컫는 고사들도 다양하다. 마치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친구를 수어지교(水魚之交)라 하고 서로 기억하지 않는 친구를 막역지우(莫逆之友)라 한다. 금과 난초 같이 귀하고 향기로움을 풍기는 친구를 금난지교(金蘭之交)라고 하고 관중과 포숙의 사귐처럼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나무 말을 같이 타고 놀며 자란 친구인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있고 친구대신 목을 내 주어도 좋을 정도로 친한 친구의 사귐을 의미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도 있다.친구를 이야기 할 때면 반드시 떠오르는 것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일화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한 때 잘 나가던 추사선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의 일이다. 선생이 유배되기 전에는 선생 집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친구들이 귀양살이를 하자 하나같이 외면했고 선생의 적소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그런데 추사선생에게 소식을 전한 유일한 이가 있었다. 그는 선생이 중국에 사절로 갈 때 동행했던 이상적이라는 선비였다. 그 분은 많은 책을 구입해 선생이 고생하고 있는 유배지인 제주도에 부쳤다. 그 친구의 우정으로 선생은 매일 다가오는 외로움과 어려움,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큰 위로와 감동이 됐다. 그래서 선생은 그 마음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았다. 그것이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이다.이 그림의 제목은 논어의 구절에서 따왔다. 날씨가 추워지고 난 후에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뜻이다. 무성한 여름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지만 날씨가 추워지는 늦가을이 되면 상록수와 활엽수가 확실하게 구분되듯 모름지기 친구 관계 또한 자연의 이치와 닮은 구석이 많다.나는 내 친구들이 내게 어떤 친구일까 생각하기 전에 내가 어떠한 친구로 남아야 할 것인지를 맨 먼저 깨우쳐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융통해 줄 수 있는 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정길(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