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적 목적은 건강하고 부유하게, 오래사는 것이다. 물론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피할 수 없는 철칙이 인간의 생명을 가로 막지마는 결국은 죽음이라는 커다란 장벽앞에 모두가 목숨을 던질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목숨을 던질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육신을 잘 관리하고 조심하면 장수할 수도 있지만 늙고 병들면 아무런 대책없이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정말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일생일사(一生一死)의 운명을 타고난 이 세상의 모든 생물(生物)은 시작과 끝이 반드시 생명의 존재를 결정케 한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의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고귀함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귀한 것이다. 사람은 ‘일생일사(一生一死)’라는 말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단계를 거쳐 한 번 태어나면 한 번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성서에도 보면 너는 흙에서 태어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사람의 종착역은 죽음이다. 로마의 수사가 세네카는 그의 서간집에서 “죽음이 어떠한 장소에서도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잘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장소에서도 죽음을 기다리라”고 했다.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하기를 하루를 산다는 것은 죽음이 하루를 당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루의 소중함이 매우 크게 느껴진다. 죽음은 우리들이 모든 것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차금(借金·빌린 돈)이며 한 순간의 이동인만큼 생각으로 밖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에 있어서 가장 큰 최후의 변화이다. 내가 존재하므로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죽으면 세상도 없어진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보면 “그대의 죽음은 우주의 질서 중 한토막이다. 그리고 세계 생명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어디서든지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자는 것이다. 인간이 살기위해서 죽는지, 죽기위해서 사는지 정치가도 숙명론자도 모르는 일이다. 죽음을 공자님만큼 진지하게 생각한 현인도 드물다. 죽음에 대한 물음에 ‘아직 삷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의미심장한 말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엄청난 공포이다. 죽음을 종교적으로 다루는 단하나의 방법은 죽음을 인생의 안목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인생의 신성을 범해선 안되는 요건으로서 이해와 감동을 가지고 주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나의 것이라 여기지 말고 남의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소망하는 자도 비참하지만 죽음을 겁내는 자는 더욱 비참하다는 것이다. 죽음은 위대한 결말이다. 손경호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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