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편집국장)  경주에도 계절은 있다. 요즘 같은 여름은 불볕더위와 무더위가 번갈아 오고 겨울에는 눈 내리며 봄이 되면 화사한 꽃이 핀다. 특히 산과 들이 물드는 가을에 고도의 멋스러움을 감싸는 단풍에 넋을 놓는다. 흔히들 고도를 일컬을 때 ‘시간이 멈춘 듯하다’는 말로 엄살을 떤다. 지나친 수사다. 고도가 아니라 산 넘어 깡촌에도 시간은 흐른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걸맞은 발전이 없다는 뜻이고 옛 모습이 비교적 잘 간직됐다는 뜻이다. 경주도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경주는 더디지만 발전을 이루고 있다. 고층 아파트가 서고 현대식 쇼핑거리도 생겼다. 시민들의 밥벌이로 공단도 생겼고 인구는 늘었다 줄었다 반복하고 있다. 언젠가 최양식 경주시장이 “금장대에 올라 시가지를 바라보면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갖는다”고 고백한 적 있다. 누구라도 금장대에 올라가 시가지를 굽어보라. 그러면 최 시장의 아픈 마음을 공감할 것이다. 천년 사직의 왕경이었던 경주의 시가지는 온통 슬래브 지붕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어느 나라의 고도가 이처럼 황량하게 변한 사례가 있단 말인가. 한 마디로 그동안 경주의 목민관들이 한 치 앞도 바라보지 않고 도시를 가꿔 왔다는 뜻이다.  경주가 경주다운 것은 역시 신라인들이 물려준 문화재 덕이다. 곳곳에 널려 있는 문화재들이 경주의 명맥을 잇게 한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경주는 다만 어정쩡한 중소도시로 무명색하게 존재할 것이다. 신라인들이 남겨준 문화재는 지금 후손들의 살이 되고 돈이 되고 피가 되고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문화재로 말미암아 삶이 남루하다며 투덜댄다. 문화재법이라는 것이 시민들에게는 강퍅한 악법이라는 것이다. 비가 새는 지붕 하나 고치려면 온갖 절차를 대 거쳐야 하고 사유재산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어쩌랴, 신라 천년의 융숭했던 문화유산이 아니었다면 경주의 존재가치는 더 협소했을 것이고 시민의 삶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최소한 외지인의 “어디 사느냐”는 질문에 “경주 산다”고 대답했을 때 돌아오는 부러운 시선은 받고 살지 않는가.  경주가 곧 신라라는 등식을 굳건하게 굳히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도시에 살고 있는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물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라의 우아하고 융숭한 문화에 둘러싸여 사는 시민의 자랑스러움을 자각해야 한다.  내 친구 오세윤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이 사진전의 표제는 ‘신라의 발견’이다.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가 토해내는 신라의 모습이 낱낱이 펼쳐진다. 우리가 무심코 봐 왔던 신라의 아름다움이 작가의 미학으로 포장돼 있다. 빛을 이용한 놀라운 형상의 변용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카메라를 메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사나이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그의 모습은 우직한 신라인의 후예다웠다. 그가 30년 동안 집중했던 것이 신라의 문화재였으니 이미 이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할만하다. 그는 경주의 옛 사진이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한 촬영결과로만 전해오는 것에 자극을 받아 미련할 정도로 경주에만 렌즈를 들이댔다. 경주는 늘 그의 화두였다. 그리고 하나 둘 기록했고 이제는 그 기록들이 화석이 될 차례다.  이런 결과물들이 경주의 자존심을 지켜나간다. 이제는 시민들이 화답할 차례다. 그의 뚝심이 일궈낸 예술적 성과를 우리가 빛내야 한다. 품고 있으면서도 가치평가에 서툴렀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세계 어디를 내놔도 뒤지지 않는 품격 있는 우리의 문화재가 아닌가. 화려하거나 거대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우아한 우리의 유산을 재발견하고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오세윤의 사진전에 가 보면 우리가 신라에 살고 있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알게 된다.